‹ 목록으로 해뜨기 전, 왕녀의 신랑

3화

다음 날 나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 무늬가 눈에 익숙해서 몇 초간 내가 어디 있는지도 헷갈렸다. 밤새 설친 잠 때문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는데 목덜미가 뻐근했다. 어제 그 얘기를 듣고 뒤척인 흔적이 몸에 그대로 새겨진 느낌이었다. 세수를 하고 도장 문을 열었지만, 몸이 제대로 안 움직였다. 평소라면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목검을 몇 번 휘둘러 감을 잡았을 텐데, 오늘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수련생들이 오기 전까지 나는 그냥 마룻바닥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나무 무늬가 눈에 익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외울 지경인데도, 오늘은 그마저도 낯설게 느껴졌다. 청화 가문 차기 가주의 호위무사. 한때는 그 직함이 나름 자랑스러웠다. 3년 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 새벽부터 검을 잡고, 밤에는 경계를 서고, 몸이 부서지도록 훈련했다. 검술 실력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았다. 청화 가문 내에서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까지는. 하지만 그건 다 옛날 얘기였다. 지금 나는 그냥 도장주다. 학생 서른 명 남짓 받는, 그것도 대부분 동네 아이들이나 취미로 배우는 직장인들인, 그런 평범한 검도 도장의 주인. 가끔 관장이라고 불릴 때마다 나는 스스로도 어색해서 웃는다. 관장이라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호칭이다. "사범님, 저 오늘 좀 늦었어요." 오전 첫 수련생인 열두 살짜리 꼬마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신발끈도 제대로 못 묶은 채로 뛰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얼른 준비하고 자세 잡아." "오늘 학원 숙제가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늦게 자서, 알람도 못 듣고." 숨도 안 쉬고 이유를 줄줄 늘어놓는 게 귀여워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이 때는 뭐든 다 큰 사건이지, 싶었다. 수련이 시작됐지만 내 머릿속은 전혀 딴 데 가 있었다. 아이들이 목검을 잡고 기본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세가 흐트러진 걸 잡아주는 손짓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계속 다른 곳을 떠돌았다. 청화 가문이 나를 다시 찾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혹시 정말로 다현이 나를 다시 부르려는 거라면. 그리고 그게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라, 예전 자리로 돌아오라는 뜻이라면. 나는 갈 수 있을까. 갈 자격이 있을까. 호위무사라는 자리는, 그저 검을 잘 쓴다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신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뢰는 한 번 흔들리면 다시 쌓기가 배는 어렵다. 나는 이미 한 번 그 신뢰를 배신했다. 다현이 나를 필요로 했던 그날 밤, 나는 없었다. 지금도 그날의 어둠, 그날의 정적, 그날의 텅 빈 방이 눈앞에 스치듯 지나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청화 가문의 담을 다시 넘지 못했다. "사범님, 딴생각하시죠." 수련생 중 한 명이 지적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데,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아이들 가르치는 직업이라 그런지 남의 표정을 읽는 데 도가 튼 것 같았다. "아, 미안. 다시 해보자." "저희 자세 다 이상한데 그냥 넘어가셨어요." "그, 그건 아니고." 말이 조금 더듬어졌다. 나는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이들 자세를 하나하나 바로잡아주는 손끝이 평소보다 굼떴다. 신분의 벽이라는 게 그런 거였다. 예전에는 호위무사라는 직함이 있어서 그나마 다현 옆에 설 수 있었다. 명분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나는 평범한 도장주고, 그녀는 여전히 청화 가문의 당주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클리셰지만, 그게 클리셰라고 해서 덜 아픈 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신분 차이라는 게 내 인생에 이렇게 들어와 앉을 줄은 몰랐다. 다가갈 자격조차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수련이 끝난 뒤, 아이들이 하나둘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도장 뒤편 마당에 앉아 물을 마셨다. 목이 타서 그런지 물이 유난히 달았다.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색이 그대로 펼쳐진 하늘. 이런 날씨에 이런 기분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날씨는 죄가 없는데 나는 그 맑음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경야였다. 몇 번의 진동이 더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형." "뭐 하냐, 요즘." "도장 운영하지, 뭐." "어제 청화 가문 사람 왔었다며."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이 동네가 얼마나 좁은데. 지우가 그러던데, 너 그 얘기 듣고 얼굴이 하얘졌다고." 지우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저 사촌 남매는 이상하게 정보력이 좋았다. 어디서 뭘 어떻게 캐내는 건지, 가끔은 정보기관에 취직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별거 아니었어. 그냥 안부 인사였다니까." "안부 인사에 그렇게 얼굴 하얘지는 사람이 어디 있냐." "……."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경야는 그런 나를 아는지,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오늘 저녁에 도장으로 갈 테니까 각오해라. 지우도 데려간다." "뭐 하러." "몰라서 물어? 너 요즘 이상한 거 다 알거든."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나 평소랑 똑같아." "평소랑 똑같다는 애가 통화 목소리부터 기어들어가고 있는데, 누가 속아." 말은 못 이겼다. 원래 이경야한테는 뭘 숨기려 해도 잘 안 됐다. 대학 때부터 그랬다. "저녁에 뭐 사 오지 마. 그냥 몸만 와." "몸만 가서 네 냉장고 뒤지려고. 각오해."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하늘을 봤다. 구름이 아까보다 조금 더 흘러가 있었다. 이상하다는 게 뭔지, 나 자신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다들 나를 이상하다고 한다. 어쩌면 정말로 이상해진 걸지도. 아니면 원래부터 이상했던 걸 그동안 아무도 눈치 못 챈 걸 수도 있고. 나는 자격 없는 사람이다. 다현 곁에 서기에도,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기에도. 그 확신만은 그 어느 날보다 선명했다. 마당에 앉아 있는 내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저녁에 이경야와 지우가 오면 뭘 물어볼지, 어떻게 대답을 얼버무릴지, 그 궁리조차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그 생각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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