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나는 돌아서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옆집 베란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후드 차림의 은채가 나왔다. 손에는 어제와 똑같은 캔맥주가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낮의 그 완벽한 미소 대신 나른한 무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몇 번이나 오늘 낮의 매점 풍경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계산대 너머로 손님들에게 웃어 보이던 그 얼굴과, 지금 눈앞에 있는 무표정한 얼굴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낮의 은채는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학생회관을 지나는 남학생들이 죄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으니까. 그런데 밤이 되면 그녀는 마치 스위치를 끈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뭐라도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 들어가야 할지 잠깐 갈등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이 어색한 줄다리기를 몇 초쯤 하고 있었을까, 그녀가 먼저 이쪽을 보았고, 나는 그 시선에 붙잡힌 채로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어제와는 미묘하게 다른 톤이었다. 완전한 무관심은 아니었다. 어제는 그냥 스쳐 지나가듯 뱉은 말이었다면, 오늘은 그 안에 아주 작은 물음표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캔맥주 뚜껑을 따며 난간에 몸을 기댔고, 나는 그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말을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장이 먼저 결정을 내려버렸다.
"낮에 매점에서... 봤어요."
순간 그녀의 손이 멈췄다. 뚜껑을 따려던 캔맥주 위로 그녀의 손끝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캔에서 나던 작은 기포음마저 그 순간엔 크게 들렸다.
"봤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목소리에 경계가 섞여 있었다. 나는 괜히 말을 잘못 꺼낸 건가 싶어 손끝이 차가워졌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이럴 때 지아라면 뭐라고 했을까. 척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겠지.
"학생회관 매점, 계산대. 서은채 씨 맞죠. 다들 여신이라고 부르던데."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캔맥주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고, 나는 그 정적이 어색해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밤바람이 그 짧은 침묵 사이로 스며들었고, 나는 그 바람이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조금 더 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소문내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요. 그냥... 낮이랑 밤이 너무 달라서 신기했어요."
"신기하다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게 방어에서 나온 반응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누군가 자신의 다른 얼굴을 알아챘을 때, 사람은 대개 웃지 않는다. 경계하거나, 도망치거나, 아니면 지금 그녀처럼 낮은 냉소로 방어벽을 세운다.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요, 뭐. 이 동네 좁아서."
"저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앞으로도 안 할 거고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그런 나를 잠시 응시했고,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미묘한 경계가 조금씩 풀리는 걸 보았다. 캔맥주의 차가운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왜요?"
"네?"
"왜 말 안 하는데요. 소문 하나 퍼뜨리면 재밌을 텐데."
나는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지아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척하지 말라는 말. 진짜 감정을 표현하라는 말. 며칠 전 카페에서 지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항상 안전한 대답만 골라서 하는 게 문제라고, 좀 위험해 보여도 진짜 마음을 말해보라고 했었다.
"그냥... 여기서 보여준 얼굴은,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거랑 다르잖아요. 그게 왜인지 좋아 보여서요.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말을 뱉고 나서야 나는 그게 얼마나 진심에 가까운 말이었는지 깨달았다. 은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캔맥주를 홀짝이며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이내 낮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낮의 완벽한 미소도 아니고, 밤의 무표정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웃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눈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숨을 잠깐 멈췄던 것 같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그럴 것 같아요."
짧은 웃음이 오간 뒤 침묵이 이어졌지만, 그 침묵은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과는 조금 달랐다. 서로의 존재를 조심스럽게 인정한 자리에서 오는 편안한 정적이었다. 창문 너머로 들리던 옆 건물의 텔레비전 소리도, 저 멀리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음도 그 순간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친구, 태현이라는 애요. 낮에 계속 와서 소개팅 얘기하던데. 아는 사이예요?"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태현이 벌써 직접 접근한 모양이었다. 태현은 같은 학과에서 소문난 인싸였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몇 번인가 술자리에서 그가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같은 학과예요. 그냥 그렇게 친한 건 아니고."
"그래요."
그녀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나는 그 짧은 대답 안에 뭔가가 얹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관심일까, 아니면 단순한 귀찮음일까. 나는 그걸 물을 자신이 없었다. 손끝으로 난간을 슬쩍 쓸어보았지만, 그 차가운 감촉도 머릿속의 물음표를 지워주지는 못했다.
밤바람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녀는 캔맥주를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캔이 살짝 찌그러지는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 속에 유독 크게 울렸다.
"들어갈게요."
"네, 저도."
그녀가 창문을 닫기 직전, 나를 향해 짧게 말했다.
"또 봐요."
그 말이 어찌나 담백한 톤이었는지, 나는 그게 그냥 인사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인지 한참을 고민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베란다 불빛이 꺼지는 걸 보고서야 나는 겨우 몸을 돌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태현이 벌써 그녀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동시에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그 짧은 웃음이 자꾸 떠올라 잠을 설쳤다.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고, 다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목소리 톤, 그 웃음의 각도, 캔맥주를 쥔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되짚어보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이 비밀스러운 밤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 나는 매일 밤, 저 베란다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태현의 그림자가 조금씩 짙어지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내일 학교에서 그를 마주치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그리고 그가 다시 은채의 이름을 꺼낸다면 나는 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런 것들이 뒤엉킨 채로 나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 밤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