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 돌아간 뒤, 나는 텅 빈 방 한가운데 서서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는 저녁의 냄새를 맡았다. 새로 이사 온 오피스텔은 볕이 잘 든다는 부동산 사장의 말과 달리 창이 좁았고, 대신 베란다가 제법 넓어서 그 점만은 마음에 들었다. 상자는 열두 개, 그중 절반은 책과 앨범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옷가지와 잡동사니였다. 나는 그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굳이 가장 무거운 상자부터 뜯었다.
턴테이블이 든 상자를 열고 바닥에 앉아 부품을 하나씩 꺼내 늘어놓는 동안, 나는 손끝에 낀 먼지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톤암을 고정하고 카트리지를 맞추는 손놀림은 몇 번을 반복해도 지겹지 않았다. 이불이며 옷가지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채였다. 순서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이런 사소한 고집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준다고 믿었으니까. 누군가는 그걸 유별나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멋있다고 했다. 나는 그 두 가지 평가 중 어느 쪽이 진심에 가까운지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법학과에 입학은 했지만 나는 법전보다 필름 카메라와 바이닐 앨범 재킷을 더 오래 들여다보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남들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나는 필름을 감았고, 남들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재생 버튼을 누를 때 나는 판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그게 멋있어서 하는 건지,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하는 건지는 나조차 헷갈렸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다는 확신이 있었다. 동기들이 강의실 앞자리를 두고 다투는 동안 나는 필름 카메라의 셔터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를 세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나를 남들과 구별 지어왔다. 유치한 방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턴테이블 조립을 마친 뒤에야 나는 이불을 펴고 옷걸이에 셔츠를 걸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으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잠깐 들여다봤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하나로 묶고, 얇은 잠옷 바지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에 소름이 살짝 올라 있었다. 낯선 방의 냉기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짐 정리를 대충 마친 밤, 나는 손으로 갈아낸 에티오피아 원두를 드리퍼에 부었다. 물줄기를 나선형으로 천천히 부으며 향이 퍼지는 걸 기다리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나답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원두를 갈 때 나는 손잡이를 돌리는 리듬을 항상 같은 속도로 유지했다. 급하게 갈면 맛이 텁텁해진다고 어디선가 읽은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 커피가 다 내려질 즈음 나는 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새 동네의 밤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그런데 창을 열자마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옆집 베란다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은 채, 손에 든 캔맥주를 홀짝이며 허공을 바라보는 여자였다. 헝클어진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 올렸고, 낡은 회색 후드는 목이 늘어나 있었으며, 표정이라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나른한 얼굴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한, 그런 무심함이었다. 캔맥주 옆에는 이미 비운 캔이 두 개 더 놓여 있었다. 저 사람은 얼마나 오래 저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걸까,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 탓이었다. 침묵이 길어지면 내 쪽이 먼저 무너진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보았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짧게 답했다.
"네."
그게 다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뜻처럼 그녀는 다시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고, 나는 괜히 커피잔을 든 손이 부끄러워져서 그대로 서 있었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뭐지, 이 사람?
무례하다고 하기엔 애매했고, 친절하다고 하기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공간에 타인이 끼어든 걸 신경 쓰지 않는, 정확히는 신경 쓸 가치조차 못 느끼는 태도였다. 나는 그런 무심함이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색한 웃음이라도 지었을 테고, 아니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했을 텐데, 그녀는 둘 다 하지 않았다. 그냥 존재했다. 그 존재 방식이 낯설어서, 나는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캔맥주를 다 비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늘어뜨리듯 스트레칭을 하더니, 후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라이터가 켜지지 않자 몇 번이고 딸깍거리는 손끝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지 라이터를 쥔 각도가 자꾸 어긋났다. 라이터가 결국 켜지지 않자 그녀는 낮게 욕설을 흘렸다.
"거지 같네."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방금 전까지의 무심하고 완벽한 정적이 그 한마디로 와르르 깨졌기 때문이었다. 나른한 얼굴 뒤에 저런 목소리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서랍에서 챙겨온 지포라이터—멋으로 산 물건이었지만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를 켜서 난간 너머로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그녀는 잠깐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의아함인지 경계심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 잔물결이 미간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 색이 생각보다 짙다는 걸 알아챘다.
"고마워요."
불을 붙인 그녀는 라이터를 돌려주었고, 나는 손끝이 스치는 그 짧은 접촉에 괜히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밤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사 왔어요?"
"네, 오늘요."
"...그래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다시 난간에 등을 기댔다.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다는 신호였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무심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알고 싶어졌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몇 살인지, 왜 이 시간에 혼자 캔맥주를 세 개나 비우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밤바람이 제법 차가워서 나는 커피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나는 그 옆얼굴의 실루엣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완벽하게 정돈된 인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흐트러진 채로 놓여 있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 없는 얼굴이었다. 콧날 아래로 흐르는 담배 연기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잠깐 하얗게 빛났다가 흩어졌다.
그녀는 담배를 반쯤 태우고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인사도 없었다. 나는 괜히 그 자리에 서서 닫힌 창을 잠깐 바라보다가, 커피잔이 완전히 식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의 나태한 표정이, 어쩐지 계속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눈을 감으면 담배 연기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고, 라이터를 돌려받을 때 스쳤던 손끝의 냉기가 자꾸 되살아났다.
내일부터 학교였다. 새 학기, 새 학교, 새로운 얼굴들. 나는 그중에 그 여자를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지 가늠해보다가, 그런 계산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같은 건물, 바로 옆 베란다. 마주칠 확률을 따지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가 자꾸 궁금해졌다. 그 무심한 얼굴 뒤에 어떤 사정이 숨어 있는지, 왜 그렇게 세상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부풀어 올랐고, 나는 그 부풀어 오르는 감각이 낯설어서 오히려 더 잠에서 멀어졌다.
그리 시작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