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신전에서 파견된 사람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약초를 빻던 손을 멈추고 절구를 내려놓는데, 손바닥에 밴 땀이 절굿공이 자루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백서연이 창고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움직여서 담판을 시도하는 게 나았다. 물론 이게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최악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앉아서 기다리다가 신전 사람이 창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장면을 상상하니, 그게 더 끔찍했다. 최소한 내가 먼저 판을 짜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전 파견인은 마을 회관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사제복을 걸친 중년의 여성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서늘하게 계산적이었다. 회관 앞에는 벌써 마을 사람 몇이 줄지어 서 있었고, 다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격식을 갖춘 존댓말로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면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결국 자원해서 그 앞에 앉게 되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벌써부터 요란하게 뛰는 게, 이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러면 어쩌나 싶었다.
"약방집 둘째 아드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나는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이 여자가 이미 뭔가 알고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미소는 대체 뭘 근거로 저렇게 자연스러운 건가. 설마 벌써 내 얼굴에 뭔가 쓰여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손끝으로 무릎을 살짝 눌러가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 마을에서 도망친 이단자를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요?"
"글쎄요, 저는 약초 다루는 게 본업이라 그런 일에는 밝지 못합니다."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이 여자가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게 뻔한데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건가 싶어서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이게 그 유명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상황인가. 아니면 그냥 형식적인 면담일 뿐인가. 판단이 서지 않으니 더 불안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손에 든 문서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이단자는 사실 성녀였습니다. 신성모독과 배신의 죄로 재판을 받았지요. 그런데 처형 직전 도망쳤습니다. 이건 교단 전체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명예라. 사람 하나 죽이는 걸 명예라는 말로 포장하다니, 참 편리한 단어 선택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물론 이 생각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나는 이때가 담판의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발각될 위험이 있다면, 차라리 먼저 나서서 조건을 걸어보는 게 나았다. 이 여자 앞에서 괜히 숨기려다가 나중에 더 크게 뒤통수 맞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여지를 만들어두는 게 낫지 않겠는가.
"만약, 만약이라는 가정입니다만. 그분이 몸이 좋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다면, 신전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실 예정이신지요."
사제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면서도 속으로는 이거 너무 노골적으로 물어본 거 아닌가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아, 방금 그거 순진한 질문처럼 들렸을까, 아니면 대놓고 뭔가 알고 있다고 광고한 꼴이 되었을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어서, 나는 그냥 표정 관리에만 집중했다.
"발견 즉시 신전으로 이송할 것입니다.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요."
"단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이곳 마을에서 그런 분을 잘 보살펴 회복시킨다면, 그 정성을 참작해 주실 수 있는지도 여쭙고 싶었습니다."
최대한 우회적으로 돌려 말했지만, 사제는 그 말의 속뜻을 정확히 캐치한 듯 미소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눈빛만은 차갑게 굳어졌다. 저 미소가 문제였다. 웃는 얼굴로 저런 눈빛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이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 얼마나 오래 이런 일을 해왔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그건 신전이 결정할 사안입니다. 마을 사람이 함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요."
그 말투가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숨겨진 단호함이 명확했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그냥 통보였다. 나는 그 순간 이 담판이 이미 실패했다는 걸 직감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게 바로 벽에 부딪혔다는 느낌인가 보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그냥 접으면 백서연에게 뭘 벌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분이 자수한다면, 최소한 재판의 기회는 다시 얻을 수 있을까요."
"재판은 이미 끝났습니다. 남은 절차는 집행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었다. 재판이 끝났고 남은 건 집행뿐이라니, 이건 아예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자수해도 소용없고, 회복시켜도 소용없고, 그렇다면 대체 뭘 해야 여지가 생긴다는 건가.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그래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기로 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최소한 뭐라도 하나는 건져가야 했다.
"그렇다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요."
사제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 눈빛이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더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마치 이 사람이 나를 이미 어느 정도 의심선상에 올려놓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보름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이 마을 근처에서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면, 저희는 다른 지역으로 수색 범위를 넓힐 것입니다."
보름. 그 숫자를 듣는 순간 나는 오히려 조금은 안도했다. 담판은 실패했지만, 최소한 시간은 벌었다. 보름이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해봤다. 사흘은 몸 회복에 쓰고, 나흘은 은신처를 찾고, 남은 며칠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겠지. 보름 안에 백서연을 완전히 숨기거나, 아니면 다른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렇게 위기를 지연시키는 데 그친 게 성과라면 성과였다. 성과라고 부르기엔 너무 초라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 정도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마을 회관을 나오면서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성녀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명분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그냥 발밑에 떨어진 사람을 못 본 척하지 못했을 뿐인데, 그 대가로 나는 이제 신전 전체와 은밀한 대치 관계에 놓이게 된 셈이었다. 문을 나서는 순간 불어온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이 마을 특유의 흙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평소엔 그냥 지나쳤을 냄새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창고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백서연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걱정이었다. 보름이라는 숫자를 어떤 얼굴로 전해야 할까. 안심시켜야 할지, 각오를 다지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고민이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듯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며칠 전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나아 보여서,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신전에서 사람이 왔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눈빛에는 어떤 각오 같은 게 서려 있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저를 그냥 넘기세요. 이대로 있으면 당신도 위험해져요."
"그럴 생각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자신감 같은 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그 말이 그냥 자연스럽게 나왔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낯설게 들렸다. 이게 진짜 내 생각인가, 아니면 그냥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인가 스스로도 헷갈렸지만, 일단 뱉은 말은 주워담지 않기로 했다.
"보름 정도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당신은 일단 몸부터 회복하세요."
백서연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궀다. 나는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면서, 이게 우는 건지 아니면 그냥 지친 몸이 무너지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창고 안은 조용했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정적을 깨웠다. 나는 그 정적을 깨지 않으려고 일단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뭐라도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 마을 어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달간 약초 수집을 떠나 있던 조부가 돌아온 것이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하필 지금, 하필 이 시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