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약절구에 마른 인동초를 넣고 빻는데, 손끝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냄새가 오늘도 변함없이 코를 찔렀다. 새벽부터 조수를 서느라 허리가 뻐근했지만, 이 정도 노동이야 몰락한 귀족가 둘째 아들의 팔자에 딱 맞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견딜 만했다. 절굿공이를 쥔 손바닥에는 이미 굳은살이 자리를 잡았고, 손톱 밑에는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초록빛 물이 배어 있었다. 전생에는 이 손으로 볼펜을 쥐고 시험지를 채워 나갔었는데, 지금은 절굿공이를 쥐고 인동초를 빻고 있다니. 인생 참,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벽에 걸린 낡은 목판 달력 앞에 서서, 나는 손톱으로 오늘 날짜에 작게 새긴 표식을 확인했다. 정확히 백구십칠. 남들이 보면 그냥 흠집이라고 여길 그 숫자가,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숫자였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습관처럼 이 앞에 서서 하루씩 줄어드는 그 숫자를 확인하는 게, 어느새 밥 먹고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다.
백구십칠 일. 그 숫자가 0이 되는 날, 성녀 백서연이 다섯 서약자와 교단 전체로부터 배신당하고 처형대에 오른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왜냐고 물으면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이 세계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굳이 자각할 필요도 없이 그냥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처음 몇 년은 그 숫자를 볼 때마다 손이 떨렸는데, 이제는 무덤덤하게, 마치 오늘 날씨를 확인하듯 훑고 지나가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무덤덤함이 진짜 평온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그냥 포기해서 생긴 감각의 마비인지는 나도 헷갈렸다.
"도윤아, 그 인동초는 좀만 더 곱게 갈아라. 손님이 발라도 안 아파야 좋은 약이여."
조모가 부엌 쪽에서 소리를 지르셨고 나는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곱게 갈았는데 뭘 더 갈라는 거냐, 손끝이 다 갈려서 없어질 지경인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겉으로는 순종적인 손자, 속으로는 투덜대는 노동자. 이게 바로 강도윤이라는 인간의 이중생활이었다. 절구 안을 다시 들여다보니 이미 곱디고운 가루가 되어 있었는데도, 나는 괜히 몇 번 더 짓이겼다. 조모의 잔소리는 언제나 절대적인 법칙 같은 거라서, 거기에 논리로 맞서는 건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사실 조모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전혀 몰랐다. 이 집에서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는, 전생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 텐데, 나는 원래 이 세계와 아무 상관없는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았던 인간이었다. 약대에 다니던 대학생이었고, 밤샘 실습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죽었다는, 죽음의 사연도 참 볼품없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실습실 창문 밖으로 비치던 가로등 불빛과,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바닥에 쏟아지며 나던 소리였다. 그다음은 그냥 암전. 아프지도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화면이 꺼지듯 뚝, 끊겼을 뿐이었다.
그 다음에 눈을 뜬 곳이 여기, 몰락한 귀족가 강씨 집안의 둘째 아들 강도윤의 몸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이상한 꿈인 줄 알았다. 낯선 침대에서 낯선 부모님, 낯선 조부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 몸의 기억이 내 것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섯 살까지의 기억, 약초 이름, 조모의 잔소리 리듬까지,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상하다고 여길 새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열두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마을 서점에서 낡은 목판 책 한 권을 발견하고 표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와르르 쏟아졌다. 씨발. 그날 든 감정을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책 표지는 세월에 색이 다 바래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는데, 그 위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문양 하나만은 이상하게 선명했다. 별 여섯 개가 겹쳐진 문양. 그 문양이 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밤새 붙잡고 있던 게임, 천계의 별의 상징과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책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고, 서점 주인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때까지도 그 자세로 굳어 있었다.
천계의 별. 다섯 서약자와 성녀가 세계의 종말을 막아내는 서사시적인 판타지 게임이었는데, 나는 그 게임을 죽기 전날 밤까지도 붙잡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는 것도 잊고 밤을 새워가며 클리어했던 게임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마지막에 도달하는 배드엔딩 중 하나가, 성녀가 거짓 신성모독 혐의를 뒤집어쓰고 서약자들에게 버림받아 처형당하는 결말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얄궂었다. 왜 그 결말만 유독 기억이 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엔딩이 유독 잔인하게 만들어져서 플레이어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탓이었을 것이다. 성녀가 화형대 위에서 마지막으로 웃던 그 일러스트 한 장면 때문에 커뮤니티가 통째로 뒤집혔던 것도, 죽어서까지 기억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게임 속 세계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그냥 어이없는 우연이라고 넘겼다. 세상에 판타지 세계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설정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마을 지도의 지명이, 왕국의 역사가, 신전의 위계질서가, 하나같이 내가 알던 게임 설정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옆 마을 이름이 게임 초반 튜토리얼 지역 이름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고, 신전에서 서약자를 부르는 호칭 순서까지도 게임 대화창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현실이 나한테 개연성을 신경 써줄 리가 없었다.
확인한 이상 목표는 하나였다.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조용히 살아가는 것. 게임 시나리오의 주역들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고, 다섯 서약자니 교단이니 하는 거대한 톱니바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 그게 유일하게 안전한 생존 전략이었다. 서약자들이 얽히는 사건마다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었고, 성녀가 처형당하는 그 파국의 서사 안에서 조연 하나가 어떻게 되든 게임은 신경도 안 썼으니까. 나는 그 게임 속 세계관 안에서 이름도 없는 NPC 하나로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는 게, 지금 상황에서 그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도윤아, 손님 오셨다!"
조모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절구를 내려놓고 손을 털며 가게 앞으로 나갔다. 흙먼지 묻은 옷을 입은 노인이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왔는데, 무릎 관절이 시원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진통 연고를 꺼내며 사용법을 설명했다.
"할아버지, 이거 아침저녁으로 얇게 펴 발라주시고요, 문지르지 마시고 톡톡 두드려서 흡수시키세요. 너무 세게 문지르면 오히려 붓습니다."
"오냐, 오냐. 그런데 이거 값이 좀 세지 않냐?"
"약초값이 요새 다 올라서요, 저희도 남는 거 없습니다."
노인은 뭐라 뭐라 흥정을 시도했지만 나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값을 깎아주지 않았다. 이런 일상이야말로 내가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삶이었다.
노인이 결국 투덜대면서도 돈을 치르고 나가자, 나는 다시 달력 앞으로 돌아와 표식을 손끝으로 쓸었다. 백구십칠 일. 성녀가 파멸하는 그 날짜까지,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 되뇌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다짐이 오늘따라 유난히 헛헛하게 느껴졌다. 마치 아무리 되뇌어도 몸 어딘가에서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날 저녁, 저잣거리에서 야채를 사 오던 길에 마을 아이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 걸 지나쳤는데, 얼핏 들린 말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숲 뒤쪽에서 이상한 여자를 봤대. 옷이 다 찢어져서 거의 벌거숭이였다는데."
"진짜? 몰골이 어땠는데?"
"몰라, 나도 옆집 형아한테 들은 거야. 근데 머리색이 은색이었대. 은발이라니, 이 근처엔 그런 사람 없잖아."
나는 걸음을 멈춘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심장이 갑자기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런 게 불안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굳이 정리할 필요도 없이 이미 온몸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은발. 하필이면 은발이라니. 이 세계에서 은발을 가진 인간이 몇이나 되는지, 게임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손가락 다섯 개도 채 세지 않고 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설마. 아니, 설마 그럴 리가. 백구십칠 일이나 남았는데, 아직 시작될 시기도 아닌데. 성녀가 벌써 여기까지 흘러들어 올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애써 부정하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숲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야채 바구니가 흔들려 무 하나가 데구루루 떨어졌지만, 나는 그걸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걷고 있었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다짐이, 발밑에서부터 조금씩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