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머릿속에는 온갖 가정들이 정신없이 뒤엉켰다. 마을 아이들이 봤다는 그 여자가 정말 그 사람이라면, 이건 내가 알던 시나리오와 완전히 다른 흐름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다시 한번 게임 설정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이런 걸 되짚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지만, 그거라도 안 하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천계의 별에서 성녀 백서연은 원래 다섯 서약자의 축복을 받아 세계를 구원하는 존재였다. 다섯 서약자란 각자 검, 창, 활, 지팡이, 방패를 상징하는 최강의 기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성녀를 지키는 동시에 성녀의 힘을 세상에 증명해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성녀와 서약자들의 유대가 강해질수록 세계의 재앙이 잦아드는 구조였고, 그 유대가 무너지면 반대로 세계가 무너지는 식이었다. 유대라는 게 무슨 게이지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면서 세계의 존망을 결정한다니, 처음 이 설정을 봤을 때는 좀 뜬금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뜬금없는 설정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었다.
그런데 특정 분기, 성녀가 특정 선택을 잘못했을 경우 발생하는 배드엔딩에서는 서약자 중 한 명이 성녀를 배신하고 신성모독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머지 서약자들은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교단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침묵하고, 성녀는 아무런 변호도 받지 못한 채 처형대로 끌려간다. 그게 바로 내가 기억하는 배드엔딩이었다. 컷신 하나만 보고 손에 든 컨트롤러를 집어던졌던 기억까지 선명하게 났다. 그때는 그냥 화면 속 이야기였으니까 던질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그 엔딩은 게임 상으로도 이야기의 중반, 정확히는 왕국 대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발생하는 사건이었다. 지금은 대전쟁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시장에서 물건값을 흥정하고, 아이들은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성녀가 이렇게 일찍,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숲을 헤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왜 벌써?
숲 속으로 들어서자 나뭇잎이 젖은 흙냄새를 풍겼다. 발밑에서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나는 그 소리에도 흠칫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낮게 들리는 흐느낌 같은 소리가 귀에 걸렸다. 사람 소리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이게 사람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안심할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고, 나뭇가지를 헤치자 그 안쪽 풀숲에 웅크린 한 여자가 보였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온통 상처가 가득한 몸, 며칠은 씻지도 먹지도 못한 듯한 초췌한 얼굴, 산발이 된 은빛 머리카락. 흙과 낙엽이 뒤엉켜 붙어 있는 그 머리카락이 달빛 사이로 언뜻 빛을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온 것은, 게임 원화에서도 그렇게 강조되던 그 독특한 청록색 눈동자였다.
백서연.
확신이 드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그냥 우연히 닮은 사람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성녀 백서연이 지금, 게임 시나리오상으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시점에, 이미 모든 것을 잃고 숲 한가운데 버려져 있었다. 몇 초 전까지 하던 계산들이 전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을 밖으로 나오지 말자, 눈에 띄지 말자, 조용히 살자. 그 다짐들이 이 여자 하나 때문에 전부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저, 괜찮으세요?"
나는 최대한 놀라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다가갔다. 여자는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는데, 그 몸짓 하나에서 오래도록 쌓인 공포가 그대로 느껴졌다. 마치 손만 뻗어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 조각 같은 몸짓이었다. 이런 걸 트라우마라고 하는 건가 싶었지만, 굳이 그렇게 정리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아챘다.
"오지 마세요. 저는... 저는 저주받은 사람이에요. 가까이 오면 당신도 다쳐요."
목소리가 떨려서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게임 속에서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애로운 성녀였던 사람이, 지금은 자기 자신을 저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격차가 너무 커서 순간 이 사람이 진짜 백서연이 맞나 다시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니, 눈동자 색까지 저렇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데 의심할 게 뭐가 있나.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여러 계산이 빠르게 지나갔다. 여기서 그냥 못 본 척 돌아설까, 도와줄까, 도와준다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나.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사람과는 절대 엮이지 말아야 했다. 엮이는 순간 나는 조연도 아니고 그냥 배경 인물로 살다 죽으려던 계획을 전부 접어야 했다.
그런데 발이 안 움직였다. 왜 안 움직이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처음 마주한, 게임이 아니라 진짜 사람의 얼굴을 한 절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면 속 컷신에서는 아무리 처절해도 그저 그림이었는데, 지금 눈앞의 이 떨림은 그림이 아니었다.
"저주 같은 거 안 믿습니다."
일단 그렇게 말은 던졌는데, 속으로는 아니 이게 저주가 아니면 대체 뭘 저주라고 부르는 거야, 하는 냉소적인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런데 그 말에 백서연은 오히려 더 겁을 먹은 듯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는 거예요. 저 때문에... 다섯 분 모두가... 신전 전체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느낌만 이어졌다. 다섯 분이라니. 서약자들 전부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배드엔딩 분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벌써 이 사람에게 일어난 거란 소린데, 시기가 너무 이르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겉옷을 벗어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 순간 여자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가,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었다.
"일단 몸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는데요. 이대로 두면 오늘 밤을 못 넘길 것 같습니다."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했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밀려왔다.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단순한 찰과상이 아니라 채찍이나 매질에 의한 상처처럼 보이는 흔적들이 팔과 등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상처 가장자리는 이미 곰팡이가 슬 것처럼 짓물러 있었고, 몇몇은 채 아물지도 못한 채 다시 벌어진 자국이었다. 게임에서 봤던 배드엔딩 컷신에서 성녀가 처형 직전 이런 취급을 받는 장면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그건 처형 직전에나 벌어지는 일이었는데.
그렇다는 건, 이 세계는 이미 내가 알던 시나리오의 흐름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잔인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아니,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설마라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눈앞에 증거가 있는데 설마를 찾는 건 그냥 현실 부정일 뿐이었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진짜 그 사람인지, 내가 착각한 건 아닌지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살짝 떨렸다.
"백서연... 이었어요.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역시.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게 확신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하고 스스로 정리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사람을 지금 여기 두고 가면 죽는다. 데리고 가면 나는 게임 시나리오의 중심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위험한가.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이 안 움직이는 순간부터.
그런데 그 순간, 숲 저편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