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두 주가 지났다.
교실 안의 공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창가에 드리운 가을빛도, 복도를 오가는 발걸음 소리도 예전과 같았지만, 서은채를 둘러싼 풍경만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자리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윤소라를 비롯한 여학생들이 그녀와 함께 급식을 먹고, 쉬는 시간마다 다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는 머리끈을 빌려달라 했고, 누군가는 숙제를 함께 하자 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풍경이었다.
— 은채야, 이거 봤어? 완전 웃기지 않아?
윤소라가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며 웃었다. 서은채는 조금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이런 관심이 낯설었다. 손끝이 살짝 굳어 있었지만,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한도영이 있었다.
— 은채야, 여기 앉아.
급식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도영은 늘 서은채의 옆자리를 비워두고 손짓했다. 서은채는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점점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기 시작했다. 식판을 내려놓고 앉으면 한도영은 어느새 젓가락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오늘 축구부 훈련에서 코치가 완전 빡세게 굴렸다니까.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려.
— 그렇게 힘들어?
— 어. 근데 너 웃는 거 보니까 좀 풀리네.
한도영은 그렇게 축구부 이야기, 시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의 말투는 언제나 여유로웠고, 주변 아이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강민준은 몇 자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식판 위의 국물이 조금씩 식어가는 줄도 몰랐다.
— 야, 뭘 그렇게 봐.
옆에 앉은 반 친구가 물었다. 강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하지만 그의 젓가락은 몇 분째 같은 반찬만 뒤적이고 있었다. 콩나물 무침이 이리저리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가, 결국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접시 한쪽에 밀려나 있었다.
친구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더니 피식 웃었다.
— 아, 저기? 요즘 완전 인기 많더라, 서은채.
— ...그러네.
강민준은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눈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그쪽으로 향했다. 한도영이 뭔가 말을 하자 서은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소란스러운 급식실 안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청소 시간에 서은채와 강민준은 처음으로 함께 남게 됐다. 다른 아이들은 하나둘 청소를 마치고 빠져나갔고, 교실 안에는 두 사람과 빗자루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남았다.
사각, 사각.
빗자루로 바닥을 쓸던 서은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요즘 좀... 낯설어.
— 뭐가.
강민준은 눈을 들지 않고 물었다. 그의 손에 쥐인 빗자루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 다들 갑자기 나한테 잘해줘서. 특히 한도영이.
강민준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은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 싫어?
—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좀 이상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 무시했던 사람이잖아.
서은채는 빗자루 끝으로 바닥의 먼지를 모으며 말을 이었다.
— 갑자기 이렇게 친절해지니까, 오히려 더 어색해. 뭘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강민준은 대답 없이 다시 빗자루를 움직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 축구부 학생들의 함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러다 그가 낮게 말했다.
— 조심해.
— 뭘?
— 갑자기 변하는 사람은... 믿기 전에 한 번 더 봐야 하는 거야.
서은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강민준의 옆얼굴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반쪽만 밝게 물들어 있었다. 나머지 반쪽은 어둠에 가려져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
그녀는 그 말속에 담긴 무언가를 알아차리려 했지만, 강민준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무심했다. 그는 이내 빗자루를 세워두고 쓰레받기를 가져왔다. 대화는 거기서 끊겼고, 서은채는 더 묻지 못했다.
청소를 마치고 교실을 나설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은채는 그 짧은 대화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조심해. 갑자기 변하는 사람은...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금요일 방과 후, 한도영이 교문 앞에서 서은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고쳐 메며 웃었다. 노을이 그의 등 뒤로 낮게 깔려 있었다.
— 이번 주말에 영화 보러 갈래? 나랑 둘이.
서은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 그, 갑자기...
— 왜, 부담스러워? 그냥 친구끼리 보는 거야.
한도영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그는 한 발짝 다가서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언제나처럼 자연스러웠고, 거절하기 어려운 온기를 담고 있었다.
서은채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렸다. 발끝으로 땅을 톡톡 두드리며 머릿속으로 대답을 고르는 사이, 그리고 그 순간, 교문을 나서던 강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강민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가방끈을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했지만, 발걸음은 흐트러짐 없이 일정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아주 잠깐, 평소와 다르게 굳어 있었다는 걸 서은채는 놓치지 않았다. 눈썹 사이가 좁아지고, 입술이 짧게 다물렸다.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녀는 한도영에게 아직 대답하지 못한 채, 멀어지는 강민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한도영의 제안이 아니라, 강민준의 저 표정이었다.
— 은채야?
한도영이 그녀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서은채는 흠칫 놀라며 다시 그를 바라봤다.
— 아, 미안. 잠깐 딴생각했어.
— 뭘 그렇게 봐? 강민준?
한도영의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날이 서 있었다. 서은채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 아니, 그런 거 아니야.
— 그럼 대답은? 주말에 시간 괜찮아?
서은채는 다시 한 번 교문 밖으로 사라진 강민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짧은 순간 굳어 있던 표정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 생각해 볼게.
그녀는 결국 그렇게만 대답했다. 한도영의 얼굴에 잠시 실망의 기색이 스쳤지만, 그는 이내 다시 웃음을 지었다.
— 그래, 천천히 생각해.
그는 손을 흔들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서은채는 그 자리에 서서 노을이 지는 교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은 서로 달랐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사람의 표정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