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은서의 저택 뒤편에 마련된 작은 별채에는 며칠 사이 온갖 화장품과 옷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단 상자들이 벽을 따라 줄지어 놓였고, 그 위로 각양각색의 리본과 장신구들이 흩어져 있어, 마치 작은 시장이 통째로 방 안에 옮겨온 듯한 풍경이었다. 지안은 그 화려한 물건들을 무심한 눈으로 훑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시녀들이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을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 손끝이 두피를 스칠 때마다 낯선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그 감각조차 이제는 삼켜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다.
"오늘 밤은 사교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자리야." 은서가 화장대 앞에 서서 직접 지안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며 말했다. 그 손끝이 지안의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지안은 이상하게도 그 감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걸이의 차가운 금속이 살갗에 닿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낯선 온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목걸이 때문인지 은서의 손길 때문인지는 지안 자신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자리에 나가도 되는 거야?" 지안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지만,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스스로를 낮게 매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데려간다고 하면 돼." 은서가 잘라 말했다. 반박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었다. "넌 내 동행이야. 그거면 충분해."
"동행." 지안이 그 말을 낮게 되풀이했다. 입안에서 굴려보는 단어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거 참 편리한 말이네."
"편리해서 쓰는 거야." 은서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목걸이 걸쇠를 마지막으로 잠갔다.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 없잖아."
지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 관리를 받은 얼굴은 예전의 혈색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으나, 눈빛에는 여전히 낯선 종류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배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표정만은 낯설어서, 지안은 잠시 그 얼굴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되짚어보아야 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알잖아." 지안이 조용히 말했다. "몰락한 공작가의 딸이, 노예 신분으로 사교계에 나타났다고. 다들 손가락질할 거야."
"그래서?" 은서가 지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되물었다. 그 손길은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무거웠다.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눈치 보느라 숨어 지낼 거야? 그건 내가 아는 유지안이 아니야."
지안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옅은 웃음을 지었다. "넌 여전하네. 남 신경 안 쓰는 거."
"그런 거 신경 쓰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은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미묘한 긴장이 감춰져 있었는데, 오늘 밤 이 파티에는 은서 자신도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긴장의 결이 어떤 종류인지 지안은 알지 못했지만, 은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녀들이 마지막으로 지안의 머리에 진주 장식을 꽂아 넣는 동안, 은서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어스름이 내려앉은 하늘 아래로, 준비된 마차의 등불이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 됐어." 은서가 돌아서며 말했다. "가자."
마차가 도착한 곳은 왕도의 중심에 위치한 커다란 연회장이었다. 황금빛 샹들리에가 대리석 바닥에 빛을 흩뿌리고, 그 아래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무리를 이루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위로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연회장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지안은 잠시 숨을 고르며 안으로 들어서기를 망설였는데, 은서가 그런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아끌었다.
"같이 걸어." 은서가 낮게 말했다. "고개 들고."
"만약 넘어지면 어떡해." 지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긴장을 숨기려는 시도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옅은 떨림이 배어 있었다.
"넘어지면 내가 잡아줄게." 은서가 대답했다. 너무 쉽게 나온 말이라, 지안은 오히려 그 가벼움에 마음이 놓였다.
지안은 그 말에 이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몇몇 시선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고, 곧 낮은 속삭임들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마치 물결이 한 방향으로 일제히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시선들은 순식간에 지안 쪽으로 몰려들었다.
"저 여자, 유씨 공작가의 딸 아니야?"
"경매에 팔렸다더니, 저렇게 다시 나타날 줄이야."
"하 백작가 영애가 데리고 왔다지. 무슨 사연인지."
"그러고 보니 목걸이가 하 백작가 문양이 아닌가?"
지안은 그 속삭임들을 못 들은 척, 등을 곧게 펴고 걸음을 이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시선들에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런 감정보다 담담한 무게감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발밑의 대리석은 차가웠고, 그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조용히 올라와 그녀의 등을 곧게 세워주는 것 같았다.
*이젠 잃을 게 없으니까.*
그 생각이 오히려 그녀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이미 한 번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에게,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겉을 스치는 바람 정도의 무게밖에 지니지 못했다. 은서는 그런 지안의 곁을 지키며, 사람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받아쳤다. 그녀의 눈빛에는 누구든 감히 지안을 무시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는데, 그 눈빛이 향하는 곳마다 시선들이 슬며시 다른 곳으로 피해가는 것을 지안은 곁눈질로 알아챘다.
연회장 한쪽에서 몇몇 귀족 영애들이 다가와 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 시선은 곧 지안에게로 옮겨졌다. 화려한 부채를 든 영애들의 걸음걸이는 서로 견제하듯 조심스러웠고, 그 조심스러움 아래로 은근한 호기심이 번뜩였다.
"은서 양, 이 분은 누구신가요?" 한 영애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예의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순수한 호기심이라기보다 먹잇감을 발견한 자의 흥미에 가까웠다.
"내 오랜 친구예요." 은서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유지안이라고 해요."
그 소개에 영애들 사이에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부채 뒤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지안은 그 침묵의 결을 읽을 수 있었다. 곧 다른 영애가 입을 열었다. "어머, 그 유씨 공작가의...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내 손님이에요." 은서가 그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의 소음을 순간적으로 잠재울 만큼 명확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영애들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다시 예의 바른 웃음으로 덧칠되었다. 누군가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고, 누군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그 어색한 침묵을 메운 것은 멀리서 흘러나오는 현악기의 선율이었다.
지안은 그 순간 은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단호한 표정 속에서, 그녀는 오래전 기억 속의 어린 은서를 떠올렸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았던, 오직 지안 앞에서만 다른 얼굴을 보여주던 그 아이를. 그때도 은서는 지금처럼 턱을 살짝 치켜들고, 누구의 시선도 피하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 애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지안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웃음의 온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지안은 저 멀리 연회장 안쪽에서 자신들을 향해 고정된 또 다른 시선을 느꼈다. 처음의 수군거림들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가볍게 스치는 호기심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늠하듯 오래 머무는 눈길. 지안은 그 시선의 방향을 좇으려 고개를 돌렸지만, 인파 속에서 그것을 붙잡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만이, 그 시선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조용히 일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