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지안은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손목에 감긴 밧줄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이제는 아프다는 감각조차 무디어져서, 그저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마차 바깥으로 지나가는 거리의 소음, 사람들의 웃음소리, 상인의 호객 소리가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세상의 일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지안은 그것마저 저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저항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이제는 희미해진 듯했다.
*유씨 공작가의 딸.*
한때는 그 이름만으로 모든 문이 열리곤 했다. 시종들은 그녀의 발소리만 듣고도 문을 열어젖혔고, 사교계의 어른들은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호의를 사려 애썼다. 그러나 아버지가 처형되던 날, 저택의 문이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대신 밖에서 안으로 부서지듯 열렸던 그 순간부터, 지안의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병사들의 군홧발이 대리석 바닥을 짓밟던 소리, 어머니의 비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듯 울려퍼진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솔들은 흩어졌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그녀 자신은 채무자의 손에 넘겨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결국 노예 경매장의 나무 단상 위에 서게 되었다.
그 단상 위에서 지안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는 것을 느끼며,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을 지켜보는 듯한 그 무감각함이, 오히려 그녀를 견디게 해주었는지도 몰랐다. 단상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눈빛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는데, 그중 누구도 그녀의 눈을 오래 마주하지는 못했다. 마치 그 눈 속에 담긴 무언가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자, 이 아이는 유씨 공작가의 마지막 핏줄입니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지던 그 순간을 지안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양도 뛰어나고, 외모도 나쁘지 않으니 여러분께 좋은 값어치가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지안은 속으로 조소했다. *좋은 값어치라니. 공작가의 딸로 태어난 게 이제는 그런 식으로만 값이 매겨지는구나.* 경매사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관중에게 얼굴을 보이던 그 순간에도, 지안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어디선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갑자기 덜컹거리며 멈추었고, 지안은 눈을 뜨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빛이 이전과는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거리의 소란스러움 대신 정갈한 정적이 마차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곳이 이전과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낯선 시종이 그녀를 부축해 내리게 했는데, 그 손길이 의외로 조심스러워서 지안은 잠시 의아함을 느꼈다. 노예를 다루는 손이라기보다는, 귀한 물건을 다루는 손 같았다.
그녀가 안내받은 곳은 작은 방이었다. 벽에는 낡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손잡이가 은으로 세공된 작은 손거울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빛이 방 안을 옅은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 빛조차 지안의 마음에는 닿지 못하는 듯했다. 지안은 시종이 방을 나가자 홀로 남아, 저도 모르게 그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동시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멈출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한 얼굴은 핏기가 빠져 석고처럼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자리 잡아 있었다. 입술은 갈라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채 어깨 위로 늘어져 있었다. 한때 유씨 공작가의 영애로서 사교계에서 찬사를 받던 얼굴이, 지금은 노예 상인의 손에 이리저리 팔려다니는 물건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나구나.*
지안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슬픔이나 분노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이상하게도 무감각한 인정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공작가의 영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손끝으로 거울 표면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것마저도 먼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 같았다.
그때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지안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 발소리를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걸음걸이가 낯설지 않았다. 가볍고 절제된, 그러나 자신감이 배어 있는 발소리였다. 마치 뱀이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했으나, 그 안에는 뱀의 냉기가 아닌 다른 온도가 섞여 있었다.
"지안."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조차 낯설지 않아서, 지안은 순간 시간이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의 얼굴을 마주했다.
하은서였다. 어린 시절보다 훨씬 성숙해진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계산적이면서도 어딘가 다정한 눈빛. 은서는 예전보다 키가 더 자라 있었고, 옷차림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지위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안을 바라보는 그 시선만큼은, 어린 시절 함께 뜰을 뛰어다니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은서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담담함 아래에는 억누른 감정이 살짝 배어 있었다.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지안은 놓치지 않았다.
지안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뜻밖에도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네, 은서야. 이런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말투에는 자조도, 원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담담히 진술하는 듯한 어조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은서의 가슴을 더 아프게 찌르는 모양이었다. 은서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삼키는 것이 보였다.
"내가 널 데려왔어." 은서가 말했다. "경매장에서."
"알아." 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은 못 들었지만, 짐작은 했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은서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 말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곧 표정을 가라앉히며 방 안으로 몇 걸음 더 다가섰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방 안을 채우던 정적도 조금씩 옅어지는 듯했다.
"너는 이제 내 소유야." 은서가 말했다. 그 말투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처럼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그래. 하지만... 그런 식으로 대하고 싶지는 않아."
지안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거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울 속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하나는 여전히 빛나고 하나는 그늘에 잠긴 채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대조가 새삼스럽게 지안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소유든 아니든." 지안이 낮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예전의 유지안이 아니야. 그러니 너무 예전처럼 대하지 않아도 돼."
그 말에 은서의 얼굴에 처음으로 뚜렷한 감정이 스쳤다. 그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어딘가 초조함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은서는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지안의 손목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가, 밧줄에 눌려 붉게 부어오른 살갗을 발견한 듯 미세하게 숨을 삼켰다.
"그런 말 하지 마." 은서가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너는 여전히 유지안이야. 내가 아는 그 사람 그대로야."
지안은 그 단호함에 잠시 말을 잃었다. 거울 속 자신의 초췌한 얼굴과, 그 옆에 선 은서의 결연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감정 하나가 가슴 한구석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이름을 붙일 수 없었지만, 오래전 저 사람의 손을 잡고 뜰을 뛰어다니던 기억과 어딘가 닿아 있는 듯했다. 방 안을 채운 정적 속에서, 은서의 시선은 여전히 지안의 손목에 머물러 있었고,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지안은 아직 다 읽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