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5억 냥에 팔린 몰락 영애

2화

안채로 향하는 복도는 길고 어두웠으며,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강혁의 발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 속에서 언뜻언뜻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백작가의 선대들이 액자 속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들이 마치 오늘 밤 그가 마주해야 할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다만 턱에 힘이 들어간 채로, 조금 전 시종이 귀에 속삭인 이름을 곱씹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지시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전하던 시종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다급했고, 그 다급함이 오히려 강혁의 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하은서. 이 저택의 유일한 영애이자, 하씨 백작가의 차기 안주인으로 예정된 여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강혁의 속에서 무언가가 뒤틀리는 듯한 감각이 스쳤는데, 그것이 분노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는 그 자신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발끝에 힘을 주며 복도를 걸었고, 촛불 그림자가 그의 발치에서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짧아지는 것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집사장 노인이 복도 끝에서 강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오래된 아마포처럼 색이 바랜 낯빛으로 강혁을 맞았고, 그 눈빛에는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노인의 두 손은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으나, 그 손끝이 미세하게 서류를 매만지는 모습에서 강혁은 이 늙은이가 얼마나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사님, 오셨습니까." 노인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 존대의 형식은 갖추었으나 그 말투에는 은근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오억 냥은 아가씨의 개인 자산에서 나갔습니다. 백작님도 모르시는 일이지요." "모르신다고." 강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백작가의 재산이 그렇게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였나." "아가씨께서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으니까요." 노인이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열두 살 때 상단 지분을 손에 넣으신 것도, 백작님이 뒤늦게 아신 일이었지요. 이번 일도 그런 종류라고 보시면 됩니다." 강혁은 노인의 말에서 은근한 자랑스러움을 읽어냈고, 그것이 그의 속을 더 뒤틀리게 만들었다. 이 저택 사람들은 하은서의 기행을 마치 재기의 증거로 여기는 듯했으나, 강혁에게는 그것이 위험한 조짐으로만 보였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셈법을 능가하는 아이란, 언젠가는 그 셈법 자체를 뒤집어버릴 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노예의 이름이 뭐지." 그가 물었다.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유지안이라 하더군요." 그 이름이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강혁의 목덜미에 힘줄이 곤두섰다. 유지안. 유씨 공작가의 몰락한 영애. 그 이름을 이곳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 그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갑자기 그의 목덜미를 스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짧게 들이켰다. "유씨 공작가의..." 강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집안이 완전히 몰락한 건 알고 있었지만, 딸이 노예로 경매장에 나올 정도였나." "세상일이 그렇게 되더군요."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이 몇 년 전 반역 혐의로 처형당한 뒤, 남은 가솔들은 흩어지거나 팔려나갔지요. 아가씨는 그 딸을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셨다고 하니, 아마 그런 인연 때문에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강혁은 그 말을 들으며 이가 갈리는 소리를 냈다. 유씨 공작가라는 이름이 다시 이 저택의 지붕 아래 들어오는 것을, 그는 결코 반길 수 없었다. 그 이름과 얽힌 오래된 원한이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몇 해 전, 그 이름 하나로 그의 가문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이 늙은 집사장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 집안이 우리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이 저택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그 생각은 짧고 날카롭게 스쳤다가, 곧 다시 건조한 표면 아래로 잠겨 들어갔다. 강혁은 그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노인은 그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은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노인의 시선이 강혁의 뺨을 타고 흐르는 힘줄을, 그리고 굳게 다물린 입가를 훑고 지나갔다. "기사님께서는 유씨 공작가와 사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노인이 슬쩍 던진 말에는 아첨과 탐색이 반씩 섞여 있었다. 그 말투는 표면적으로는 그저 궁금하다는 듯했으나, 그 속에는 강혁의 반응을 낚아 올리려는 낚싯줄 같은 집요함이 숨어 있었다. "사연이라니." 강혁이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그런 것 없다." 하지만 그 대답이 너무 빠르고 너무 단호했다는 것을, 강혁 자신도 뒤늦게 깨달았다. 노인은 더 캐묻지 않았으나, 그 침묵 속에는 이미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노인은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물러섰는데, 그 동작이 마치 뱀이 먹잇감의 냄새를 확인한 뒤 조용히 몸을 사리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강혁은 더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복도를 지나 안채의 문 앞에 섰다. 문은 두껍고 낡은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그 틈새로 흘러나오는 촛불의 빛만큼은 선명했다. 문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은 하은서의 것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고, 그 목소리에는 이 저택의 어린 영애답지 않은 침착함과 무게가 실려 있었다. 강혁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 소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는지 새삼스레 곱씹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오늘 안으로 데려오라고 했잖아." 은서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돈은 이미 지불했으니, 더 지체할 이유가 없어." 그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아니라 오히려 확신에 가까운 것이 배어 있었다. 상대는 무언가를 조심스레 만류하는 듯했으나, 은서의 말투는 그 만류를 가볍게 밀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강혁은 그 대화의 온도를 가늠하며, 저 문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단순한 명령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을 직감했다. 강혁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문을 두드리기 전, 그는 자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애써 고쳐 잡았다. 이 문을 열면, 그는 오래전 묻어두었던 무언가와 다시 마주해야 할지도 몰랐다. 유씨 공작가라는 이름이, 그리고 그 이름에 얽힌 지난날의 기억들이, 마치 오랫동안 봉인해두었던 관의 뚜껑처럼 열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안에서 은서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며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들렸다. "그 아이는 나만의 것이어야 해. 다른 누구의 손도 닿지 않게." 그 말은 문틈을 넘어 강혁의 귓가에 스며들었는데, 그 어조에는 소유욕을 넘어선 무언가가, 마치 오래도록 갈망해온 것을 마침내 손에 넣기 직전의 인간이 내는 듯한 낮은 떨림이 배어 있었다. 강혁은 그 말을 듣고 손을 문에 붙인 채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이 단순한 소유욕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문 안쪽의 촛불이 흔들렸는지, 문틈으로 흘러나오던 빛이 순간 일렁였다. 강혁은 그 빛의 떨림 속에서, 자신이 지금 발을 들이려는 이 방이 단순한 저택의 안채가 아니라 또 다른 원한과 인연이 뒤엉키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문에 붙인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가, 다시 굳게 마음을 다잡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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