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복도의 정적이 오래 이어졌다.
언니가 방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방금 들은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되풀이됐다. 기록만 만들어지면 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법을 만들어서, 그걸로 누군가를 정리한다는 말이잖아.
설마 나겠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였구나.
복도를 걸어 내 방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밑에서 마룻바닥이 삐걱거릴 때마다 심장이 따라서 삐걱거렸다. 누가 뒤에서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나서도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문고리를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잠긴 걸 알면서도 계속 확인하는 이 버릇, 언제부터 생긴 건지 모르겠다.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사당에 갈 시간이었다.
이런 날에도 가야 하나 싶었다. 하루쯤 걸러도 되지 않을까, 오늘만큼은 방에 틀어박혀서 이불이라도 뒤집어쓰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라온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자 답은 하나였다.
가야 한다.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언니 방 벽에다 귀를 대고 있을 것도 아니고. 그럴 배짱도 없고, 설령 있다 해도 뭘 더 들을 수 있을 것도 아니었다. 이미 들을 건 다 들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였다.
나는 겉옷을 챙겨 입었다. 두꺼운 걸로 골랐다. 밤바람이 찰 것 같아서라기보다는, 뭔가로 몸을 감싸고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였다.
조용히 방을 나섰다. 하녀들이 다니는 시간은 이미 지났고, 아버지의 서재 불빛도 꺼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오늘 같은 날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마주쳤다가는 표정 관리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았으니까.
사당으로 가는 길, 야산의 나무들이 바람에 서걱거렸다. 낮에 들은 말 때문인지 발소리마저 크게 느껴졌다. 내 발소리인데도 자꾸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걷다가 멈춰 서서 돌아본 게 두 번이었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냥 내가 예민해진 거였다.
사당 안, 라온은 몸을 웅크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빛 털이 어둠 속에서도 옅게 빛나고 있었고, 별을 담은 눈이 나를 향해 천천히 감겼다가 열렸다. 그 눈을 보는 순간에야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도 아닌데, 이 짐승 앞에 서면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늦었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런데도 여러 겹의 소리가 겹쳐 울렸다.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목소리 하나에 몇 개의 결이 겹쳐 있는 건지, 들을 때마다 셀 수 없었다.
"오늘 좀…… 일이 있었어요."
나는 라온의 옆구리로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상처는 많이 아물어 있었다. 손바닥에서 옅은 온기가 흘러나왔고, 라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 처음 이 상처를 봤을 때만 해도 손을 대는 것조차 무서웠는데, 지금은 손끝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찾아갔다.
"많이 나아졌네요."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잘했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면서, 아주 가끔 눈빛으로만 티를 냈다. 오늘은 그 눈빛조차 평소보다 무뎠다. 뭔가 다른 걸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오늘 들은 이야기를 라온에게 털어놓았다. 언니와 누군가의 대화, '고대 율법'이라는 말, 기록을 만든다는 말.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하는 동안 내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라온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만 사당 안을 채웠다.
그러다 낮게 입을 열었다.
"이 나라에 그런 법은 없어."
"……네?"
"고대 율법이라는 것, 존재한 적이 없다. 영수와 관련된 규율은 왕실이 정한 것이 전부야. 그 위에 뭔가를 더 얹는다면, 그건 새로 만든 거짓이지."
건조한 말투였다. 그런데 그 말이 내 속을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라서 더 그랬다. 확신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이런 종류의 거짓에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없는 법을 있는 것처럼 만든다는 것. 그게 가능하다면, 그걸로 노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언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영수일 수도 있었다.
"그럼 언니가……"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끝맺을 자신이 없었다. 그 말을 완성하는 순간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은 이상한 두려움이었다.
라온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눈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걸 입 밖에 내는 건 위험해."
"그럼 어떻게 해요?"
"조심해. 지금처럼."
라온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늘 그랬다. 뒷말을 흐리는 버릇, 답을 다 주지 않는 습관. 처음엔 얄미웠는데 요즘은 그냥 그런 존재구나 싶었다. 어쩌면 답을 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 이상은 모르는 건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에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로 오늘 하루의 불안을 다 넘겨야 하나 싶었다. 뭐, 어쩌겠어. 이 짐승이 주는 정보는 늘 이 정도였으니까.
나는 다시 라온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온기가 흘러나가는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자꾸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미약한 열기, 그것 하나에 매달리듯 정신을 붙잡았다.
라온의 옆구리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살이 덜 패어 보였고, 색도 옅어졌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 중에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는 건 이거 하나였다.
"곧 다 나을 거예요."
"……알아."
또 짧은 대답.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짧음이 편했다. 말을 아끼는 이 영수 앞에서는, 나도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였다.
사당 밖에서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규칙적인 걸음이었다.
감시자들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늘 여럿이 움직였고, 발소리도 훨씬 부산스러웠다. 이건 혼자였다. 정확하게, 천천히, 마치 이쪽을 향해 곧게 걸어오는 것 같은 걸음이었다.
라온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조금 전까지의 나른한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누구지."
낮게 흘린 그 한마디에,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온기까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발소리가 점점 사당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
곧게, 이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