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래 봬도 순정파거든요

1화

복도를 걸으면 등 뒤에서 소리가 따라왔다.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쟤라니까, 쟤 맞다니까. 나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신발주머니 끈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가 했다. 손끝이 차가웠다. 겨울도 아닌데, 늦봄인데도 손끝만은 늘 겨울이었다. 해솔고 2학년 3반, 내 자리는 창가 맨 뒷줄이었다. 원래는 좋은 자리였다. 볕이 잘 들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자리. 입학하고 처음 그 자리를 배정받았을 때는 속으로 안도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걸 구경하며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 조용함이 다른 의미가 되었다. 아무도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옆자리 여자애는 내가 앉으면 슬쩍 몸을 창 쪽으로 기울였다. 마치 내가 무슨 병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통을 열 때도, 지우개를 떨어뜨려도, 아무도 주워주지 않았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예전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가늠도 안 됐다. 소문의 시작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나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 화장실 벽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서윤, 누구하고나 잔다더라. 처음엔 웃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지우면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손톱으로 긁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헛소리는 하루가 지날수록 몸집을 불렸다. 3학년 선배랑 잤다더라, 옆 학교 애랑도 잤다더라, 심지어 학원 선생님이랑도 어쩌고. 나는 그 이름들 중 누구와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소문은 진실보다 더 힘이 셌다. 진실은 조용했고 소문은 시끄러웠으니까. 시끄러운 게 이기는 거였다. 금발로 염색한 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유난히 뚜렷한 얼굴, 큰 눈, 하얀 피부. 거기에 탈색한 머리색까지 더해지니 사람들은 나를 어떤 틀에 맞춰 넣고 싶어했다. 화려한 외모는 화려한 삶을 산다는 증거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엄마의 머리색이 예뻐서 따라 했을 뿐인데. 엄마는 젊었을 때 미용실에서 일했다고 했다. 손님 머리를 만지면서도 정작 자기 머리는 늘 뒷전이었다는 엄마가, 딱 한 번 큰맘 먹고 탈색을 했을 때 사진첩 속에서 웃고 있던 얼굴이 나는 아직도 선명하다. 그 색을 따라 하고 싶어서 미용실에 갔던 날, 거울 속에서 엄마와 조금 닮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그게 잘못이었다면, 나는 뭘 어떻게 했어야 했나. 점심시간, 급식실로 가는 길에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그런 거였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벽을 짚었다. 손바닥이 시멘트벽에 긁혀 화끈했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여러 명이었다. 누구인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손바닥에 남은 붉은 자국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다시 걸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걷는 연습을 나는 오래 했다. 급식실에 들어가는 대신 나는 발길을 돌렸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 아무도 오지 않는 곳.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신발 밑창이 시멘트 바닥에 부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마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아서 발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거기 앉아서 도시락 대신 삼킨 건 숨이었다. 크게, 여러 번. 들이마시고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고.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혼자 숨는 법을 배웠더라. 엄마는 삼 년 전부터 병원에 계셨다. 처음에는 그저 몸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쉬면 나을 거라고, 병원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나도록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빠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집을 나갔다.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때였다. 어느 날 아침 아빠의 옷장이 비어 있었고, 식탁에는 짧은 쪽지 하나만 놓여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냥 잘 지내라는 말 한 줄. 나는 그 쪽지를 아직도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고 있다. 왜 버리지 않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가끔 서랍을 열 때마다 꺼내 볼까 망설이다가, 결국 그대로 밀어 넣곤 했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잊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같은 크기로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동생 서준이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아침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서준이는 아직 초등학생이라 아빠가 왜 없는지, 엄마가 왜 병원에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가끔 누나, 엄마는 언제 와,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대답을 미뤘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뒤로는 병원비까지 걱정해야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전단지도 돌렸다. 손끝이 전단지 뭉치에 베여도 밴드 하나 붙이고 계속 돌렸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이 다 빠졌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소문은, 그 모든 노력을 한순간에 짓밟았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궁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얼굴로 나를 만들어냈다.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눈가를 훔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애써 숨을 가라앉혔다.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면 안 됐다. 우는 얼굴을 보이면 그것도 소문의 재료가 될 테니까. 이서윤 옥상에서 울더라, 이서윤 불쌍한 척한다더라.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계단 위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같은 반, 그리고 같은 빌라. 강태오였다. 그는 항상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하필 여기서, 하필 이런 얼굴로. 도망칠 곳도 없었다. 계단은 하나뿐이었고, 그가 그 계단을 막고 서 있었다. 강태오는 반에서도 말이 없는 편이었다. 누구와도 깊게 어울리지 않았고, 소문 같은 것에 끼어드는 법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같은 빌라에 산다는 것,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인사를 나눈 적도 몇 번 없었다. 그는 별말 없이 옥상 난간 쪽으로 걸어가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그저 자기 볼일을 보러 온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하늘을 보는 건지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적어도 그는 나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뭐라고 캐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눈치를 살피며 왜 우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내가 여기 없는 사람처럼, 딱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했다. 나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다시 차올랐지만, 이번엔 참지 않았다. 그가 보든 안 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어깨가 들썩였고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억지로 삼키던 것들이 한 번 터지자 멈추지 않았다. 옥상 위로 바람이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멀리서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5교시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강태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같은 옥상 위에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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