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목요일의 간식 침입자

3화

옥상 한쪽엔 낡은 물탱크가 있었다. 녹이 슬어 여기저기 얼룩진 표면에, 사람 두 명이 겨우 몸을 숨길 만한 폭이었다. 나윤이 내 팔을 붙잡고 그쪽으로 밀어붙였다. "들어가!" "저기요, 저희 이렇게 붙어 있으면 더 이상해요." "조용히 해." 등이 차가운 철판에 닿았다. 물탱크 옆면은 오후 햇살을 받아도 서늘했고, 그 냉기가 셔츠를 뚫고 그대로 스며들었다. 나윤의 어깨가 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었다. 그녀 숨소리가 내 귀 옆에서 들렸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거리인데, 지금은 그 숨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으흠, 여기 자물쇠 또 고장났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우리 담임, 박정수였다. 박정수 선생님은 원래 그다지 꼼꼼한 사람이 아니었다. 수업 준비물도 자주 까먹고, 반 애들 이름도 절반은 성으로만 기억하는 타입. 지난달엔 출석부를 통째로 잃어버려서 반장이 대신 이름을 불렀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하필 이 순간에 옥상 순찰을 도는 건 정말 최악의 우연이었다. 확률로 치면 로또 2등쯤은 될 것 같았다. "어이구, 바람 좋다."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난간 쪽으로 걸어왔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타박타박 이어졌다. 물탱크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조금만 방향을 틀면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나는 숨을 최대한 얕게 쉬려고 애썼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아주 천천히 내보냈다. 그런데도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혹시 저 소리까지 박정수한테 들리는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나윤이 내 옷깃을 꽉 붙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손톱이 옷감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학교에서는 늘 여유로운 얼굴이었는데. 복도를 걸을 때도, 급식실에서 줄을 설 때도, 항상 남 신경 안 쓰는 표정이었던 그녀가 지금은 눈을 꽉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야?" 그녀가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우리, 담임." 나도 입 모양으로만 대답했다. 그녀 눈이 커졌다. "헐, 니네 담임 이름이 뭐야?" "박정수요." "어, 그 박정수 맞아? 3반?" "어떻게 알아요." "몰라. 그냥 유명해. 애들 사이에서 대충 하는 담임으로." 담임의 대충함이 이런 식으로 소문나 있다는 게 웃기면서도, 지금 이 순간엔 오히려 그 대충함에 기대를 걸어야 했다. 제발 오늘도 그 대충함이 발휘되기를. 나는 속으로 빌었다. 박정수 선생님, 오늘만 딱 5분만 더 대충 하세요. 박정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더니 하품을 했다. 화면 불빛이 그의 얼굴을 잠깐 밝혔다가 어두워졌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리고, 다시 확인하고, 또 두드렸다. 게임을 하는 건지 뭘 검색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라면 먹으러 가야 하는데." 그가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슬리퍼 소리가 다시 타박타박 멀어졌다. 나윤과 나는 숨을 참았다. 문이 다시 삐걱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살았다." 나는 물탱크 뒤에서 몸을 스르륵 미끄러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나윤이 픽 웃었다. 아까의 긴장한 얼굴은 사라지고 다시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 완전 겁쟁이네." "저기요,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했거든요." "과장이 심하다." "저한테는 이게 목숨이나 마찬가지예요. 저 존재감 지키는 게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말해야 하나. 그런데 어차피 그녀는 이미 내 비밀 아지트를 알아버렸고, 나도 그녀의 진짜 성격을 알아버렸다. 이미 서로 발을 담근 사이였다. 이제 와서 감출 것도 없었다. "저는 눈에 안 띄어야 편해요. 뭐, 주인공 같은 애들은 매번 일이 터지잖아요. 시험 기간에 짝이 갑자기 전학 온 재벌집 자식이라거나, 갑자기 담임한테 불려가서 이상한 오해를 받는다거나. 저는 그런 거 딱 싫어요. 조용히 지내다가 조용히 졸업하고 싶어요." 나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근데 지금 담임이랑 하마터면 걸릴 뻔한 거, 그거 완전 주인공 같은 상황 아니야?" 순간 말이 막혔다. "그, 그건 예외예요." "흐음." 그녀는 재밌는 걸 발견한 표정으로 나를 계속 쳐다봤다. 마치 이상한 표본을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날 밤 집에 가서도, 씻으면서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그 눈빛이 자꾸 떠올라서 나는 몇 번이나 이불을 뒤척였다. *** 그날 이후로 목요일의 옥상은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됐다. 나윤은 정말로 매주 그 시간에 올라왔다. 처음엔 어색했던 대화도 몇 번 반복되니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첫 번째 목요일엔 그녀가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나눠 먹었다. 참치마요와 불고기, 반씩 뜯어서 서로 바꿔 먹으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두 번째 목요일엔 비가 올 것 같다며 그녀가 우산을 챙겨왔는데, 결국 비는 안 오고 우산만 짐이 됐다. 세 번째 목요일엔 그녀가 이어폰 한쪽을 내밀며 노래를 들려줬다. 나는 그 노래 제목을 물어보지 못했다. 왠지 물어보면 이 순간이 특별해질까 봐, 그게 부담스러워서였다. 그녀는 게임 얘기를 좋아했고, 특히 지고 있을 때 소리를 지르는 습관이 있었다. 한 번은 랭킹전에서 역전패를 당했다며 옥상 난간을 손바닥으로 탁 치기도 했다. 그 소리에 근처 비둘기들이 놀라서 우르르 날아갔다. 학교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교실에서의 나윤은 늘 조용히 웃고, 말을 아끼고, 누구에게도 틈을 안 보이는 애였는데, 옥상에서는 껄껄 웃고 욕도 섞어 쓰고 다리를 쭉 뻗고 앉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너 진짜 학교에서랑 딴판이네요." 언젠가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여기선 아무도 안 보잖아. 너도 그렇잖아." 그 말이 맞았다. 나도 여기선 조금 다른 사람이 됐다. 평소라면 절대 안 할 만한 말도 술술 나왔고, 평소라면 신경 쓸 시선도 여기선 신경 쓰지 않게 됐다. 그리고 그 격차가 커질수록, 나는 조금씩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목요일이 다가오면 괜히 시계를 자주 확인했고, 옥상 계단을 오를 때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가 먼저 와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고, 내가 먼저 도착해서 그녀를 기다릴 때는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그녀 앞에서는 나도 조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존재감을 지우고 사는 게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고 했던 나였는데, 목요일 옥상에서는 그 전략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그렇게 싫지 않았다. 문제는, 그 경계가 옥상 안에서만 지켜졌어야 했다는 거다. 그런데 다음 주 월요일, 복도에서 사건이 터졌다.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복도를 걷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나윤이 친구들과 무리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조용한 표정으로, 무리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으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발견한 순간, 그녀 표정이 확 바뀌었다. 나윤이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 것이다. 반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것도 옥상에서나 볼 법한, 활짝 웃는 얼굴로. "어! 야, 여기서 보네?" 주변 애들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나윤의 친구들 눈빛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우리 반 애들 눈빛도, 전부 똑같은 질문을 담고 있었다. '저 둘이 아는 사이였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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