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본관 응접실 앞에서 한지훈이 나를 세웠다.
복도는 조용했다. 발소리마저 카펫에 먹혀 사라지는 그런 곳이었다.
문을 두드리기 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는 알아 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마른 느낌이었다. 이유는 몰랐다.
"선우 공작가의 상징이 왜 쇠사슬인지 알아?"
나는 몰랐다. 그냥 문장(紋章)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저택 정문에도, 마차에도, 하인들의 제복 단추에도 새겨진 무늬였다. 그저 장식인 줄 알았다.
"이 가문 대대로 흑쇠사슬이라는 마법을 계승해. 몸에서 검은 쇠사슬을 뽑아내서 다루는 마법이야. 위력이 어마어마해서 왕실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힘이지."
"그런데요?"
"공작님의 외동딸, 선우예린 영애가 그 마법의 계승자야. 왕도에서도 최연소 천재로 소문났었어."
과거형이었다. 나는 그 어미 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있었어요, 라는 건……."
한지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복도 끝, 별채로 이어지는 통로 쪽을 향했다.
"1년 반 전에 영애의 어머니, 공작 부인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돌아가셨어. 그날부터 영애는 별채에서 나오지 않아."
나는 그 순간 별채에 대한 소문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인들이 지나가며 소곤거리던 말들. 저택 뒤편 불빛 없는 창. 아무도 그쪽으로 심부름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던 말.
그게 다 이 이야기였구나.
"명의도, 학자도, 왕도 최고의 상담사도 다녀갔어. 다 손을 못 댔다고 했어. 영애는 말도 안 하고, 웃지도 않고, 그냥……."
한지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인형 같대. 눈은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보는 것처럼."
나는 그 표현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인형.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한지훈은 대답 대신 문을 두드렸다.
나는 뭔가 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문이 이미 열리고 있었으니까.
응접실 안에는 선우태경 공작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있었고, 눈 밑은 유난히 짙게 그늘져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얼굴이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중 어느 것도 손댄 흔적이 없었다.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으니까.
"강도윤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나는 긴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저절로 옷깃을 만졌다.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았다.
공작은 나를 한동안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뒤에 있는 뭔가를 보는 눈빛 같기도 했다.
"내 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겠지."
"조금 들었습니다."
공작은 창가로 걸어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창밖으로 정원이 보였다. 손질이 잘 된 나무들, 가지런한 화단.
그런데 사람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1년 반 동안 아무도 그 애를 웃게 하지 못했다. 학자들도, 마법사들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 담담함 속에서 뭔가 무겁게 눌린 것을 느꼈다.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손은 창틀을 꽉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그런데 왜 저를……."
"자네는 다르니까."
공작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시선이 짧았다. 대신 더 날카로웠다.
"자네는 겁이 없고, 눈치도 없고, 아무 데서나 잘 웃는다고 들었네."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
'그거 칭찬이에요, 아니면……'
속으로 물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명령을 내리겠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런 종류의 말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내 딸의 방에 매일 드나들도록 해. 다만 가르치려 하지 마라. 위로하려 하지도 마라. 그냥 곁에 있어 주면 된다."
짧고 무거운 명령이었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곁에 있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건가, 싶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곁에 있으라는 건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르치지도 말고, 위로하지도 말고, 그냥 있으라고.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그런 식의 임무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공작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한지훈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가자는 신호였다.
응접실을 나서면서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 공작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다.
한지훈이 나를 별채로 안내했다. 저택 안쪽으로 갈수록 복도는 어두워지고 소리는 사라졌다.
벽에 걸린 그림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흰 벽만 이어졌다.
공기도 달라졌다. 본관보다 서너 도쯤은 낮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문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부터는 나도 못 들어가."
"왜요?"
한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가리켰다.
나는 그 문을 바라보았다. 흰 나무문에 검은 쇠사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무늬는 그냥 장식이 아니었다. 손끝으로 문양을 따라가 보니 미세하게 튀어나온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진짜 쇠사슬이 나무 속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들어가면 알아서 하는 거야?"
"응.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아무도 몰라."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손잡이를 잡는 손끝이 떨렸다. 문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옷깃이 스치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 침묵이 얼마나 깊은지, 나는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한지훈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나 혼자 그 문 앞에 남겨졌다.
문고리는 차가웠다. 쇠 특유의 서늘함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냥 곁에 있어 주면 된다.'
공작의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울렸다.
말은 간단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손잡이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