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같은 시각, 도서실 앞 복도.
윤소야는 도서실에서 막 빌려 나온 추리소설 한 권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손끝에 닿는 표지의 매끈한 질감과 종이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어서인지 걸음걸이마저 평소보다 느긋했다. 점심시간의 복도는 오가는 학생들로 어수선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낮의 빛이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 빛과 그림자의 경계쯍 어딘가에서 익숙지 않은 소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2학년인 소야는 원래도 사람이 많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시끄러운 무리 속에 섞이기보다는 조용한 서가 사이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시간을 더 좋아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그녀는 이미 수백 권의 추리소설을 통해 관찰과 추론의 습관을 몸에 새긴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저런 소란은 눈에 담지도 않고 조용히 방향을 바꾸어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걸음이 멈췄다.
무리에 둘러싸인 1학년 여학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울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 표정을, 소야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감정만은 선명하게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소야는 안경 너머로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매를 하고 있었고, 조금 마른 몸에는 헐렁한 교복 카디건이 걸쳐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존재감이 옅은 사람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그녀를 두고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라 말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사실 관찰을 위한 위장이었고,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표면 아래에 숨은 것들을 향해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에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이하준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 순간 소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리의 중심이 아니라 바닥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하은이라 불리는 여학생의 신발과, 그 앞에 서 있는 에리의 손끝으로.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 말싸움의 내용에 집중했겠지만, 소야의 눈은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젖은 흔적이 없는데.'
소야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떠오른 그 한 문장이, 곧이어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창밖으로 내리던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도, 하은의 신발 밑창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그 사실이 소야의 머릿속에서 작은 균열처럼 자리를 잡았고, 그 균열은 곧 더 큰 의문으로 번져나갔다.
무리 중 한 명이 팔짱을 낀 채 하은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증거도 없이 우기지 말고 그냥 인정해. 다 봤다니까? 네가 이하준 선배 뒤 밟는 거."
"저는... 그런 게 아니라..." 하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은 끝을 맺지 못한 채 허공에서 흐트러졌다.
에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고, 무리 중 하나가 손을 뻗어 하은의 팔을 잡아채려 했다. 하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등 뒤에는 이미 차가운 벽이 있었고, 그 벽에 부딱히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여섯 개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좁혀들었다. 복도의 공기는 점점 더 팽팽해졌고,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도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끼어들었다가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복도 사이를 갈랐다.
"잠깐."
소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짧게 말을 던지자, 무리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힘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복도의 소란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에리는 처음 보는 2학년 선배가 끼어드는 상황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고, 옆에 있던 친구들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 낯선 얼굴이 누구인지 가늠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곧 에리는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후배들 앞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뭔데요, 선배." 에리가 다소 날카롭게 되묻자, 소야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하은을 바라보았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소야의 안경 렌즈에 반사되어 잠시 눈빛을 가렸지만, 그 뒤에 있는 시선만은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은은 자신을 향한 그 시선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소야와 에리를 번갈아 보았다.
"신발." 소야가 짧게 던진 그 한마디에, 복도에 모여있던 모두의 시선이 순간 하은의 발끝으로 옮겨갔다.
정적이 잠시 흘렀다. 누군가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그저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려는 듯 숨을 죽였다. 에리 역시 예상치 못한 화제 전환에 잠시 말을 잃은 표정이었는데, 그 짧은 침묵 사이로 소야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신발 좀, 보여줄래?"
소야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하은을 향해 물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하은은 갑작스러운 그 질문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야를 올려다보았고, 손끝으로 자신의 교복 치맛자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
"저... 신발이요?" 하은이 되묻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묻어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흔들림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낯설고도 미묘한 안도감을 주고 있는 듯했다.
복도의 시간이 잠시 멈춘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빛이 소야의 옆얼굴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소야의 눈은 이미 무언가를 확신한 사람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하은의 신발 끝, 그 마르고 깨끗한 밑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에리는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듯, 팔짱을 낀 손끝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하은의 발끝으로, 그리고 그 위에 조용히 서 있는 소야의 얼굴로 번갈아 옮겨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