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던전에 쉼터 차렸습니다

5화

그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숲 저편으로 멀어졌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육중한 발소리, 그리고 침묵.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오후 12시 02분. 정자 안은 조용했다. 다친 두 사람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얕고 빠른 숨. 리더로 보이던 남자는 발목에 감은 붕대를 살피고 있었다. 손끝으로 붕대 매듭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느슨해졌는지, 너무 조였는지. 직접 감아준 붕대였는데도 나는 다시 눈으로 확인했다. "통성명이나 할까요."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숨이 조금 편안해진 목소리였다. "박준서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까칠했다. 장갑을 낀 채로도 느껴지는 굳은살이었다. "강도윤입니다." "윤서아예요." 여성 탐험가가 짧게 인사했다. 목소리에 아직 긴장이 남아 있었다. "김재혁입니다." 팔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힘없이 말했다.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살짝 숙였다. 이름이 붙자 세 사람이 조금 더 사람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다친 탐험가 셋이었다. 피 흘리는 팔, 부러질 듯한 발목, 겁에 질린 눈. 이제는 박준서, 윤서아, 김재혁이었다. 이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그 차이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이 정자는 언제부터 있었어요?" 윤서아가 물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다고요?" 박준서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스킬로요?" "네."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설명할 게 없었다. 오리진 등급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게 없었으니까. 레벨업 조건 불명. 성장 방식 불명. 한계 불명. 내가 아는 건 그저 이 스킬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오리진이요?" 김재혁이 힘겹게 웃었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요." 나도 몰랐다. 일주일 전까지는. 일주일 전 나는 그저 증권사에 다니는 애널리스트였다. 던전은 뉴스에서나 보던 남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정자 하나를 지어 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 박준서가 정자 지붕을 올려다봤다. 갈대로 엮은 지붕 사이로 던전 특유의 흐릿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거 진짜 대단한 거네요."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몬스터를 완전히 막아버리다니." 대단하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난 3주, 아무도 이 정자를 알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 처음으로 그 말을 들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뻐야 하는데, 기쁘지 않았다. 그저 몸이 무거웠다. 다리 근육이 뻐근했고, 어깨가 뭉쳐 있었다. 스킬을 쓴 뒤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이었다. 오후 12시 30분. 윤서아가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어라." 그녀가 정자 안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거 뭐예요?" 나도 그쪽을 봤다. 나무판 바닥 한쪽에 작은 항아리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없었다. 정자를 만들고 세 사람을 눕힌 뒤, 나는 이 공간을 몇 번이고 둘러봤다. 그때는 텅 비어 있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올라왔다. 스프였다. 따뜻한 국물 향이 정자 안에 퍼졌다. 된장 비슷한, 그러나 조금 더 짙은 향이었다. "이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스킬창에 새 알림이 떠 있었다. [휴식지 부속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제공 가능: 회복용 스프 (1일 1회)] 조건도, 원리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왜 지금 활성화됐는지, 왜 하루 한 번인지. 그저 눈앞에 결과물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드셔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세 사람이 서로 눈치를 봤다. 누구도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을 먹는다는 게 이 세계에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김재혁이 먼저 한 모금 마셨다. "어……" 그의 눈이 커졌다. "이거 뭔가, 몸이 좀 따뜻해지는데요." 윤서아도 한 모금 마셨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진짜네요." 그녀가 항아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팔의 통증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아요." 박준서까지 마신 뒤, 정자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긴장이 풀린 듯한, 안도가 스며든 공기였다. 누군가 작게 웃었다. 누군가는 그제야 눈을 제대로 떴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기뻐야 할 순간인데,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 대신 머릿속으로 계산이 돌아갔다. 하루 한 번. 세 명이 나눠 마셨다. 다음번엔 몇 명이 올지 몰랐다. 열 명이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도 항아리 하나뿐일까. 질문은 늘어나는데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오후 12시 47분. 윤서아가 빈 항아리를 내려놓으며 나를 봤다. "저기요, 강도윤 씨." "네." "여기, 또 와도 되나요?" 그 질문이 정자 안에 잠시 머물렀다. 박준서와 김재혁도 나를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세 쌍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의 무게가 스프 향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네." 나는 말했다. "언제든지요." 윤서아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조금 전까지 얼굴에 남아 있던 긁힌 상처와 두려움이 그 웃음 속으로 잠깐 사라졌다. 그 순간, 뭔가가 확실해졌다. 이 공간은 진짜였다. 누군가에게 진짜 가치를 가진 공간이었다. 지난 3주간 텅 비어 있던 정자가 이제야 제 몫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 아래, 다른 감각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이 가치를 유지하려면 나는 무엇을 계속 내줘야 하는가. 그 질문에는 아직 답이 없었다. 오후 1시. 박준서가 발목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 "중앙광장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않았다. 오늘 오전에만 몬스터를 마주했고, 응급처치를 두 번 했고, 스킬의 정체 모를 기능을 확인했다.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손가락 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세 사람을 데리고 정자를 나섰다. 호숫가를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박준서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절뚝이며 걸었다. 무게가 상당했다. 한 걸음마다 그의 체중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윤서아와 김재혁은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윤서아가 김재혁의 성한 팔을 부축했다. 셋 다 절뚝이는 걸음이었다. 걷는 내내 시계를 확인했다. 1시 15분. 1시 34분. 1시 52분. 숲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였다. "저 원래 헌터 아니었어요." 박준서가 문득 말했다. 숨이 거칠었다. "작년까지 회사 다녔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어떤 회사요?" "증권사요." 박준서가 잠시 웃었다. "세상 참, 다들 어디선가 넘어온 사람들이네요." 그 말이 맞았다. 던전이 열린 뒤 세상은 완전히 재편됐다. 직업, 계급, 안전. 모든 게 처음부터 다시 매겨졌다. 중앙광장이 보일 때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근육이 아니라 뼈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박준서가 다른 탐험가들에게 인계될 때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윤서아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음 주에 또 갈게요!" 그들이 던전 출구 쪽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 지켜봤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이 가빴다.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중앙광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다른 헌터들, 상인들,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들. 아무도 나를, 방금 세 사람을 구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나는 그저 이 광장을 스쳐 지나가는 얼굴 없는 헌터 중 하나였으니까. 오후 2시 10분. 혼자 돌아오는 길,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세 통. 오하늘이었다. 전화벨이 던전 안에서는 울리지 않는다. 확인은 던전 밖에 나와서야 가능했다. 세 통이나 놓쳤다는 사실이 화면 위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선배 오늘 저녁에 통화 가능해요?] [동일철강 쪽 문제 생겼어요] [월요일 미팅 전에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메시지를 보는 순간, 정자에서의 시간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스프의 온기도, 윤서아의 웃음도, 박준서의 감사인사도 모두 저편의 일 같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회사였다. 동일철강이었다. 월요일이었다. 동일철강.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숫자들이 떠올랐다. 지난주 종가, 거래량, 목표주가. 던전 안에서 붕대를 감던 손이 이제는 주가 그래프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전화할게요] 손끝이 차가웠다. 오늘 하루 종일 뭔가를 소모한 느낌이었다. 체력을, 시간을, 그리고 뭔지 모를 어떤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스킬창을 다시 열어봤다. [휴식지] [등급: 오리진] [효과: 안식의 영역 생성, 몬스터 진입 차단] [부속 기능: 회복용 스프 제공 (1일 1회)] [레벨업 조건: 불명]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음 주에 다시 가야 하는지, 얼마나 자주 가야 하는지, 이 스킬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피곤에 절어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얼굴도 아니었고, 헌터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지쳐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역 이름들을 세면서, 나는 생각했다. 오늘 세 명을 구했다. 다음 주엔 몇 명일까. 그 다음 주엔. 숫자가 늘어날수록 항아리는 여전히 하나일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에 내가 얼마나 더 많은 걸 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그 틈에 끼어 눈을 감았다. 동일철강의 숫자와 스킬창의 물음표가 눈꺼풀 안쪽에서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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