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멈춰 있었다.
문 안쪽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보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손잡이를 돌리려던 손을 슬며시 거두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걔한테는 아직 말 안 했다니까."
누구한테.
나는 숨을 죽였다. 신발장 옆에 서서 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우습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응, 그 애가 알면 힘들어할 거야."
그 애.
서은인가.
머릿속으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가, 아니라고 지웠다가, 다시 떠올랐다.
"질투가 문제가 아니라, 이건 다른 얘기잖아."
질투.
그 단어가 귀에 콱 박혔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손을 말아 쥐었다가 다시 폈다. 진정해. 별일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야, 별일이 아니면 저렇게 목소리를 낮추지 않지.
"도윤이가 알면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내 이름이 나왔다.
숨이 턱 막혔다. 발끝부터 뭔가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문에 붙인 귀를 떼지 못했다. 이 이상은 듣지 말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은이가 그러겠다고 약속했는데, 언제까지 갈지..."
서은이 뭘 약속했다는 거지.
뭘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거야.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서로 부딪혔다.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불안이라는 덩어리가 가슴 한복판에 툭 떨어졌다.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거, 그게 문제야."
그 사람.
누구.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흔들림이 느껴졌다. 어머니가 저런 톤으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이건 정말로 내가 알아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순간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쿵.
심장이 한 번 더 크게 뛰었다. 나는 얼른 문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두어 걸음 물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깨를 펴려 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고 숨은 고르지 못했다.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눈이 커졌다가, 곧 억지로 눌러졌다.
"도윤아, 언제 왔어?"
"방금이요."
거짓말을 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썼다. 목울대가 한 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그걸 눈치챘을까 봐 나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
"들어와, 밥 먹어야지."
어머니가 애써 밝게 웃었다. 그 웃음이 부자연스러웠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 얼굴을 너무 잘 알았다. 뭔가를 숨기고 있을 때 어머니가 짓는 표정이었다.
식탁에 앉았지만 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국물이 식어가는 소리, 도현이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딸깍거리는 소리,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방금 들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질투.
약속.
그 사람.
세 단어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엄마."
"응?"
숟가락을 움직이던 어머니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 짧은 정지가 오히려 더 크게 눈에 들어왔다.
"방금 누구랑 통화했어요?"
"아, 그냥 아는 사람."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준비된 대답 같았다.
"서은이 얘기하는 것 같았는데."
어머니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눈빛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들었니?"
"조금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조금이 아니라 거의 다 들었지만, 조금이라고 말하는 게 그나마 어머니를 덜 몰아붙이는 방법 같았다.
어머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그 사이 침묵이 식탁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엄마, 뭔가 숨기고 있는 거예요?"
"도윤아."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해줘요."
어머니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손끝으로 식탁 모서리를 꾹 눌렀다. 나도 모르게 내 손끝도 따라 움직였다. 이 습관, 어디서 배운 건지 모르겠다.
"이건 서은이 얘기해야 할 문제야. 엄마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근데 왜 엄마가 알고 있는데요?"
"그건..."
말이 끊겼다. 어머니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나는 그 눈이 무언가를 붙잡으려다 놓치는 걸 지켜봤다.
도현이가 방에서 나오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얘기야? 나도 껴, 나도."
"아무것도 아니야, 도현아 방에 가 있어."
어머니가 급히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한 톤 더 날카로웠다.
도현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딸깍 닫히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저 녀석은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게 부럽기까지 했다.
"엄마, 나 이제 애 아니에요."
"그래서 더 말 못 하는 거야."
그 말이 오히려 더 큰 구멍을 남겼다. 애가 아니라서 못 하는 말이라면, 대체 얼마나 큰 얘기라는 걸까.
어머니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를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눈물이 고이려다 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에 더 캐물을 용기를 잃었다가, 다시 그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서은이한테 직접 물어봐."
"물어봤어요. 걘 없다고만 해요."
없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말을 하는 서은의 눈은 한 번도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럼 좀 더 기다려줘."
"언제까지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도 더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
다음 날, 학교 복도에서 로라를 마주쳤다.
로라는 이 학교에 얼마 전 전학 온 학생이었다. 늘 웃는 얼굴이었는데, 그날은 나를 보더니 웃음기를 살짝 지웠다.
"강도윤 학생, 표정이 안 좋네요."
"그런가요."
"무슨 일 있어요?"
말할까.
말아야지.
이 사람한테 뭘 말한다고. 어제 들은 통화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별일 아니에요."
로라가 나를 잠시 바라봤다. 뭔가를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다 문득 화제를 바꾸듯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네?"
"서은이라는 애, 예전에 어디 살았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멈칫했다. 서은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여기서 계속 살았는데요. 왜요?"
로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확신했다가, 곧 그 확신을 스스로 거두는 얼굴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미국에서요?"
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신경 쓰지 마요."
로라가 급히 화제를 돌리며 자리를 떴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뭔가를 피하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서은이 어디서 본 것 같다니.
어머니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라는 게, 로라와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떠오른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뒤엉켰다. 확실한 건 하나도 없는데, 불안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서은이 보였다.
낯선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이는 어머니와 비슷해 보였다. 서은은 그 사람 앞에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어제 문틈으로 들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다시 귀를 때렸다.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거, 그게 문제야.
내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