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은 내가 설계한다

4화

마차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울렸다.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빨랐다. '와, 진짜네.' 하녀가 머리 장식을 마무리하려고 핀을 하나 더 꽂으려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아가씨, 아직 옷도……." "괜찮아. 이대로 나갈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대답했다. 숨이 조금 가빴지만 얼굴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열 번의 죽음을 견딘 얼굴이 이 정도 동요에 흔들릴 리가. 거울 속 얼굴은 태연했다. 그 태연함이 진짜인지, 아니면 삶을 거듭 반복하며 익힌 위장인지는 나조차 헷갈렸다. 하녀가 손에 든 핀을 화장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딸랑, 작은 소리가 났다. "그래도 옷자락이라도……." "됐다니까." 말은 짧게 끊었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하녀는 더 말하지 않고 물러섰다. 저 애도 눈치는 있으니까. 아홉 번의 삶에서 조씨 가문의 마차는 늘 정오에 왔다. 여덜 번째 삶까지는 정확히 정오였다. 시계추가 정확히 열두 번을 치는 순간, 대문이 열리고 은빛 매 문양의 마차가 들어섰다. 그 규칙성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정확했다. 아홉 번째 삶에서는 십일 분 빨랐고, 열 번째 삶, 지난 삶에서는 삼십 분이 빨랐다. 그리고 이번엔 두 시간이었다. '누가 시계를 돌리고 있나.' 말이 안 되는 생각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복되는 하루의 규칙이 매번 조금씩 앞당겨진다는 건, 이 저주의 시간표를 조율하는 손이 어딘가 있다는 뜻이니까. '아니면 내가 뭘 잘못 건드렸든가.' 지난 삶에서 나는 응접실 벽난로 앞에 몰래 물을 뿌려두고 죽었다. 그전 삶에서는 하녀장에게 화재가 날 거라고 미리 말해두고 죽었다. 매번 다른 방법을 썼는데, 결과가 늘 같았다는 건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시간표까지 바뀌었다.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아직 모른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저택의 구조를 다시 눈에 담았다. 1층 응접실, 그 옆 서재, 그리고 서재와 응접실을 잇는 좁은 복도. 화재는 언제나 응접실에서 시작됐다. 정확히는 응접실 벽난로 뒤쪽, 낡은 목재 벽에서. 아홉 번의 삶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발화점이었다. 계단 난간에 손을 얹었다. 나무 질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아홉 번을 만졌던 그 난간, 아홉 번을 밟았던 그 계단. 몇 번째 계단이 살짝 흔들리는지도 외웠다. 열두 번째 계단, 오른쪽 끝. '이 정도면 그냥 이 집 목수 해도 되겠다.' 대문 앞에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문양은 조씨 가문의 것—은빛 매가 날개를 펼친 모양. 먼저 내린 사람은 조성민 공작이었다. 온화한 얼굴, 눈가에 잡힌 잔주름이 유난히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 저 얼굴을 보면 누구나 좋은 사람이라고 믿을 것이다. 나도 처음 두어 번의 삶에서는 그렇게 믿었다. 그다음 조태현이 내렸다. 짙은 남색 예복,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표정을 안 짓는 게 아니라 짓는 법을 모르는 얼굴. '저 인간은 아홉 번을 봐도 안 익숙해지네.' 마차에서 내려서는 걸음걸이까지 똑같았다. 오른발이 먼저 나오고, 예복 옷자락을 한 번 정리하고, 고개를 살짝 들어 저택을 훑어본다. 저 시선이 나를 향할 때 그 안에 담긴 건 관심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이 저택이 얼마짜리인지, 이 결혼이 자기 가문에 뭘 남기는지 재는 눈빛. 뒤이어 조민재가 내렸고, 그 손을 꼭 잡은 조하늘이 총총 걸음으로 뒤따랐다. "서아 님." 조민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열여섯쯢 되어 보이는 나이, 눈매가 순한 소년이었다. 형과 달리 그 눈엔 온기가 있었다. "누나!" 조하늘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일곱 살, 아직 세상의 무서운 걸 하나도 모르는 얼굴. 두 아이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 정원 쪽을 두리번거렸다. 조하늘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꽃 폈다!" "그러네." 조민재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순해서 오히려 내 속이 더 시렸다. '저 둘, 이번에도 살릴 수 있을까.' 아홉 번의 죽음 중 여섯 번은 이 둘이 나보다 먼저 죽었다. 화재 때문이 아니었다. 마차 사고, 낙마, 우물에 빠짐. 방식은 매번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조태현의 손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증거는 한 번도 남지 않았다. 한 번은 마차 바퀴가 빠졌고, 한 번은 말이 갑자기 날뛰었고, 또 한 번은 우물 덮개가 사라졌다. 매번 '사고'라는 단어로 정리됐다. 사고가 여섯 번이나 반복되면 그건 사고가 아니라 계획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 알고 있었다. 이 저주 같은 반복 속에서. "오시는 게 빠르셨습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일정이 당겨졌습니다." 조태현이 대답했다. 존댓말이었지만 온기는 하나도 없었다. '일정이 당겨졌다고? 누가 당겼는데.' "무슨 사정이 있으셨나요?" 슬쩍 물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짧고 단호한 대답. 더 캐물으면 이상하게 보일 게 뻔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 말투 하나로 사람 답답하게 만드는 재주는 아홉 번을 봐도 여전하네.' 아버지, 강대윤 공작이 상석에서 나와 손님들을 맞았다. 딸을 보는 눈빛엔 반가움이 없었다. 그냥 물건을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준비는 다 됐나." "예, 아버지." 대답은 순종적이었지만 속은 달랐다. '준비는 무슨. 두 시간이나 당겨졌는데 뭘 준비하겠어.' 아버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늘 그랬다. 딸의 상태보다 결혼이 성사되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조씨 가문과의 혼약은 강씨 가문에 남은 마지막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그 동아줄의 끝에 매달린 물건이었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순간, 복도 끝에서 늙은 하녀장과 눈이 마주쳤다. 하녀장은 오래전부터 이 저택에서 일했고, 아홉 번의 삶 동안 늘 같은 얼굴로 나를 봤다. 두려움과 동정이 섞인 얼굴.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 몸짓, 그거 알아. 저건 경고야.' 하녀장은 매번 삶마다 조금씩 다른 신호를 보냈다. 어느 삶에서는 손끝으로 응접실을 가리켰고, 어느 삶에서는 그저 눈을 피했다.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뭔가 다르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냥 이번에도 소용없다는 뜻일까. '말을 좀 해주면 안 되나. 답답해서 죽겠네.' 물론 그녀도 말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건 안다. 이 집안에서 하녀장의 말은 아무 힘이 없으니까. 여섯 번째 삶에서 그녀가 화재를 미리 경고했다가 쫓겨난 걸 본 적도 있다. 그 뒤로는 몸짓으로만,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만 신호를 보냈다. 혼약식장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나는 코를 슬쩍 킁킁댔다. 아직 냄새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복도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지나쳤다. 강씨 가문의 역대 인물들. 그중 누구도 웃는 얼굴이 없었다. 이 집안은 원래부터 이런 곳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아홉 번을 반복하는 동안 내 시선이 그렇게 바뀐 걸까. 응접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문틈 사이로 옅은 탄내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한 탄내였다. 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건, 말도 안 돼.'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홉 번의 삶 동안 이 냄새는 언제나 서약문을 낭독한 뒤에야 났다. 정확히는 신부가 서약문의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벽난로 뒤쪽에서 불씨가 벽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그 타이밍은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도 열기 전에 나고 있었다. 발끝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옷자락을 꽉 움켨쥐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긴장한 신부처럼 보이겠지만, 내 속은 지금 완전히 다른 이유로 요동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시계를, 아주 노골적으로, 더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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