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준서야."
낮고 차분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준서는 도망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고,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어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전, 문틈으로 보았던 그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지금 이 순간 도망을 치는 것도,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것도 전부 지옥 같았다.
'봤어. 분명히 봤어.'
준서는 속으로 되뇌었지만, 정작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셔츠를 축축하게 적셔가고 있었다.
정미경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옷매를 살짝 정돈했는데, 그 손길에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조급함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통제하는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옷깃을 매만지는 손가락 하나하나가 지나칠 정도로 여유로웠고, 그 속도마저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왜 저렇게 태연하시지.'
준서는 그 낯선 태도가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왔는데, 보통이라면 자식에게 이런 모습을 들킨 부모라면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정상일 텐데, 정미경의 눈빛은 마치 처음부터 이 순간을 예상했다는 듯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준서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만약 어머니가 당황하고 화를 냈다면, 준서는 그저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방을 뛰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침묵과 여유는, 마치 준서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쪽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들어와서 앉아."
그녀가 침대 옆의 작은 소파를 가볍게 손짓으로 가리켰고, 준서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얼떨결에 몸을 움직여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발걸음마다 무게가 실렸다. 마치 늪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고, 소파에 가까워질수록 숨이 턱턱 막혀왔다.
문이 등 뒤에서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크고 무겁게 들려왔다.
철컥.
그 작은 마찰음이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은 듯했다. 이제 이 공간은 밖과 완전히 분리된,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놀랬지."
정미경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는데, 그 말투에는 사과의 기색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한마디 안에는 은근한 재미가 배어 있는 것처럼도 들렸다.
준서는 소파에 걸터앉으면서도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이리저리 방황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고, 그렇다고 바닥만 보고 있기에는 그 침묵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엄마도… 요즘 많이 힘들었거든."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가게 이야기를 꺼냈고, 팬데믹 이후 매출이 반토막 난 데다 은행 이자 독촉까지 겹쳐 밤마다 잠을 이루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카드값이 밀린 게 벌써 세 달이고, 다음 달엔 재계약 시기라서 월세도 올려달래. 사장님이 이번엔 진짜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말은 그렇게 흘러나오는데, 그 목소리에는 걱정이나 절박함보다는 오히려 다른 무언가를 위한 밑밥처럼 느껴지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준서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바닥만 내려다보았는데, 그 와중에도 방금 목격한 장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이야기를 왜 지금 나한테…'
가게 사정이야 알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어머니가 한숨을 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고, 통화 중에 은행 담당자와 목소리를 높이던 것도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방금 전의 그 장면을 목격한 직후에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준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의문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정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앉은 소파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또각.
슬리퍼 굽이 마룻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고,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준서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가 마치 소파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소파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듯이 자세를 낮추며,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어머니의 얼굴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 익숙한 향수 냄새. 그런데도 그 눈빛만큼은 준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것이었다.
"넌 언제부터 이렇게 컸을까."
그 말투는 흡사 오랜만에 만난 아이를 대하는 어머니의 것처럼 들렸으나, 그녀의 손끝이 준서의 뺨을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 그 접촉은 결코 평범한 모정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찌릿.
피부 위로 전해지는 낯선 감각에 준서는 몸을 움찔했고, 그 반응을 지켜보던 정미경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뭐야, 이 느낌은.'
준서는 뺨에 남은 온기가 이상하게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에게 소름이 끼쳤다. 이건 분명 어머니의 손길이었는데, 왜 이런 낯선 반응이 몸에서 일어나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놀라긴, 엄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명백히 아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고, 준서는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미 시작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시선은 마치 준서라는 존재 자체보다, 준서의 어떤 부분, 어떤 반응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가하는 듯한, 혹은 재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에서는 분명하게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몸은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준서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 순간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가야 정상인데, 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인지, 왜 이 낯선 긴장감에 몸이 반응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정미경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지나 목덜미로 미끄러지듯 이동했고, 그 손길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손끝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옷깃 사이로 서늘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그 감각은 분명 불쾌해야 마땅한데도, 준서의 몸은 오히려 그 반대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가 요즘, 많이 외로웠어."
낮게 속삭이는 그 한마디에,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달라진 것만 같았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정적이 방 안을 채웠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이상하게도 크게 들려왔고, 창밖에서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조차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준서는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은 이미 소파 등받이에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 손이, 목덜미 위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을 준서는 느꼈다.
'제발, 그만···'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