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박났는데 엄마가 이상하다

1화

이준서는 자취방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반지하 원룸의 벽지 얼룩을 멍하니 바라보며, 통장 앱을 다시 새로고침했다. 숫자는 여전히 삼만 이천 원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그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잔인하게 느껴졌다. 창문 위쪽에 나 있는 좁은 채광창으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과 신발만이 이따금 스쳐 지나갔고, 그 그림자가 벽에 어른거릴 때마다 방 안의 곰팡이 냄새가 더 짙게 코를 찔러오는 듯했다. 아버지 이성호가 운영하는 생활용품 유통업체는 이 년째 팬데믹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대출 이자만 겨우 막고 있는 상태였고, 매달 초 걸려오는 아버지의 전화는 언제나 밝은 목소리로 시작했지만 끝에는 늘 힘없는 침묵이 뒤따랐다. 누나 이서연과 동생 이도윤까지 매장 일을 거들며 버티고 있다는 걸 알기에, 준서는 등록금이든 생활비든 손을 벌리는 일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특히 누나는 원래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매장 카운터에 서 있는 처지였고,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을 미룬 채 배달 아르바이트와 매장 일을 병행하고 있었으니, 준서만 유일하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이번 학기는 정말 어떻게든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는 통장 앱을 몇 번이나 껐다 켰다 하며 그 숫자가 혹시라도 바뀌어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었다가 스스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이불 위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향해 한숨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잉··· 귀에는 분명히 들리는데 방 안 어디에서도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이명이 짧게 울렸고, 준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위층 배관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벽에 귀를 대보기도 했지만, 소리는 벽 너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의 머릿속, 정확히는 두 눈 사이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직후, 눈앞의 허공에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려 넣은 듯한 반투명한 사각형의 창이 떠올랐다. [일일 지능 시스템이 숙주와의 최초 접속을 시도합니다···] 글자는 마치 형광 물감으로 쓴 듯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문구를 보는 순간 준서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이게··· 뭐지.' 그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 보았고,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힘껏 눌러도 보았지만, 창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여전히 떠 있었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잠든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또렷한 정신 상태였기에, 그는 이것이 꿈이나 환각일 리 없다는 걸 오히려 더 선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창은 그의 당혹감을 개의치 않고 곧바로 다음 문구를 띄웠다. [접속 성공. 숙주 개체명 : 이준서. 상태 : 정상. 시스템 가동을 시작합니다.] 뒤이어 화면이 잔상처럼 흔들리며 새로운 문장들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는데, 그 흐름이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된 절차를 밟아가는 듯 매끄러웠다. [일일 지능 시스템은 숙주의 생존과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설계된 보조 체계입니다.] [하루에 한 번, 숙주에게 임무가 부여됩니다.] [임무의 성공적인 수행은 보상으로 이어지며, 실패 시에는 대가가 따를 수 있습니다.] 대가라는 단어에 준서의 시선이 잠시 멈췄으나, 곧이어 떠오른 새로운 창이 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대가라니, 그게 무슨···'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고, 그는 저도 모르게 그 흐름에 이끌려 다음 문장을 눈으로 쫓았다. [첫 번째 일일 임무가 생성되었습니다.] [임무명 : 버려진 인연.] [내용 : 오늘 오후 여섯 시 이전, 신촌역 3번 출구 인근 중고서점의 헌책 더미 속에서 낡은 만년필 한 자루를 찾아내어 그것을 서점 주인에게 매각할 것.] [보상 : 현금 1,000만 원 (즉시 지급).] 숫자를 본 준서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만년필 한 자루로 천만 원이라니, 장난이 아니면 사기다.' 그는 몇 번이나 그 숫자의 자릿수를 다시 세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앞에 놓인 것은 분명히 일천만 원이라는 숫자였고, 그 뒤에 붙은 즉시 지급이라는 문구까지 더해지자 오히려 의심이 확신처럼 굳어져 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이건 분명 뭔가 함정이거나, 아니면 내가 잠깐 미친 거겠지.' 그러나 화면 하단에 은근하게 깜박이는 문장 하나가 그의 의심을 더욱 부풀렸다. [임무 거부 시 다음 접속까지 상태가 유지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모호함 자체가 오히려 더 큰 불안을 자극했다. 혹시 이걸 무시했다가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동안 쌓아온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애써 그 상상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창밖에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커튼 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들었고, 준서는 그 빛줄기를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일단 확인해보는 수밖에.' 어차피 지금 그에게는 잃을 것이 별로 없었고, 반대로 이 임무가 진짜라면 등록금과 밀린 방세, 심지어 부모님께 드릴 용돈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액수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 돈이 실제로 들어왔을 때를 잠깐 상상해 보았는데, 아버지의 한숨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누나가 다시 하고 싶던 일을 시작할 수 있고, 동생이 미뤄둔 입학을 다시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조여왔다.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그냥 헌책방에 다녀오는 셈 치자. 손해 볼 건 시간뿐이니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투를 걸치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 신촌까지는 버스로 삼십 분 남짓이었으니, 여섯 시라는 마감 시간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는 서둘러 지갑과 휴대폰을 챙기면서도 계속해서 허공에 뜬 창을 흘깃거렸고, 혹시라도 그 창이 갑자기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확인했다. 신발을 신으며 그는 문득 이 모든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다시 곱씹었다. '만년필 하나 찾아서 팔면 천만 원이라니, 이런 걸 믿고 뛰어가는 내가 더 웃기지.'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현관을 향하고 있었으니, 이성과 감정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 그는 다시 한번 허공에 남은 창을 향해 눈길을 던졌는데, 그 순간 문장 하나가 새롭게 덧붙여지고 있었다. [주의 : 이 임무의 결과는 숙주의 일상 전반에 예기치 못한 파급을 남길 수 있습니다.] 짧고 담담한 경고문이었지만, 왜인지 그 한 줄이 유난히 오래 눈에 밟혔다. '파급이라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뭔가 크게 바뀐다는 건가.' 준서는 그 문장의 의미를 곱씹을 새도 없이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등 뒤로 방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오르며 지상으로 올라서자, 오후의 햇살이 눈을 찌르듯 쏟아졌고,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는 동안에도 그의 시야 한 귀퉁이에는 여전히 반투명한 창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고, 그것은 마치 그의 시선을 따라다니며 이 모든 것이 결코 착각이나 순간의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듯했다. 정류장에 도착해 숨을 몰아쉬며 전자게시판을 확인하니, 신촌 방면 버스가 오 분 뒤 도착한다는 안내가 떠 있었고, 준서는 그 오 분마저도 조급하게 느껴져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헌책 더미 속에서 만년필 한 자루라니, 대체 어떤 만년필이길래···' 그는 임무 내용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서점의 위치와 헌책 더미라는 단서만으로 그 물건을 찾아낼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준서는 마지막으로 허공의 창을 한 번 더 바라보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버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기묘한 하루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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