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저주받은 땅에서 데려온 봄

4화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선 건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창밖으로는 별빛조차 인색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마차 바퀴가 자갈길에서 흙길로 바뀌면서 덜컹거림이 조금 줄어들었을 즈음, 김돌쇠가 말들에게 물을 먹여야 한다며 작은 냇가 근처에 마차를 세웠다. 물소리가 졸졸 들려오는 걸 보니 정말 냇가는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뭔가 불편한 낌새를 먼저 느꼈다. '이 감각, 틀린 적이 없었지.' 회사에서도 부장님이 유독 친절하게 다가올 때 꼭 사고가 터졌던 걸 생각하면, 이 불안이라는 게 꽤 신뢰할 만한 경보 장치였다. 강도현이 잠시 주변을 살피러 자리를 비우겠다며 마차 밖으로 나갔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의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담요를 끌어당긴 채 마차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사실 이 좁은 공간에 혼자 남는다는 게 이상하게 무서울 일도 아닌데, 낯선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된 처지라 뭐든 다 의심스럽고 뭐든 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시기였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김돌쇠가 마차 문을 슬쩍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씩 웃었다. 처음엔 정말 별거 아닌 호기심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웃음의 결이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웃음이라는 게 참 신기한 표정이다.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사이의 거리가 근육 몇 개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 몇 개의 차이를 사람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분해낸다. "엘프라고 했지, 근데 좀 특이하게 생겼구먼."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훑어보듯 말했다. 특이하다는 말에 나는 온몸의 근육이 굳는 걸 느꼈다. 이 반응 하나로도 내가 얼마나 그 단어에 지쳐 있었는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특이하다, 신기하다, 독특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표현들이었는데, 그게 다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이든 엘프든, '특이하다'는 말은 결국 '내가 너를 관찰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또 시작이구나.' 나는 시선을 피하며 담요를 더 끌어당겼다. 이럴 때 눈을 마주치면 오히려 상대의 호기심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된다는 걸, 나는 전생의 지하철 경험으로 배운 바 있었다. 하지만 김돌쇠는 시선을 피한다고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는지, 오히려 몸을 더 들이밀며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빛에서 나는 순수한 궁금증을 넘어선 무언가—호기심의 탈을 쓴 무례함, 혹은 그보다 더 나쁜 것—을 읽었다. 마차 안은 좁았고, 그가 상체를 기울일수록 나와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손끝이 저절로 담요 끝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그림자가 덮치듯 나타났다. 강도현이 언제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김돌쇠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물러세우며 낮게 말했다. "거기까지." 목소리에 별다른 격정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는데, 그 차분함이 도리어 더 무서웠다. 화를 낼 때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는 건 흔한 일이지만, 화를 억누를 때 오히려 목소리가 낮아지고 조용해지는 부류의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걸 나는 이때 새삼 실감했다. 그 짧은 두 마디에 담긴 무게가 얼마나 컸는지는 김돌쇠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지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게, 그냥 궁금해서." 궁금해서라는 변명이 이 상황에 얼마나 무력한지는 김돌쇠 자신도 아는지 말끝이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시선만은 어정쩡하게 나와 강도현 사이를 오갔는데, 마치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느 편에 서야 유리한지를 계산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강도현은 아무 대답 없이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김돌쇠의 손에 쥐여주었다.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고, 나는 그 소리만으로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골드가 들어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적어도 마부의 한 달 치 벌이는 훌쩍 넘을 만한 무게감이었다. "오늘 본 것은 잊는 게 좋을 겁니다." 강도현의 말에는 협박도 부탁도 아닌, 묘하게 그 둘의 중간쯤 되는 온도가 실려 있었다. 그 말에 김돌쇠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는데, 재미있는 건 그 얼굴에서 방금까지의 두려움이 순식간에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두려움이 안도로, 안도가 다시 묘한 존경심 비슷한 것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 얼굴 위에서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 돈을 받았으면 그럴 만한 손님이었겠지.' 아마 김돌쇠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는데, 그 자기합리화의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세계는 정말이지 돈으로 기억까지 다시 쓰는 곳인가 싶었다.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이 실수를 해도 다음 날 봉투 하나면 다 잊혀지곤 했으니까. '취업난도 있고 뇌물도 있고, 여긴 그냥 축소판 인간세상이구나' 싶은 생각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판타지 세계라고 해서 뭔가 대단히 고결하고 낭만적인 규칙이 작동할 거라 기대한 적은 없었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익숙한 방식이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적어도 예측 가능한 세계라는 뜻이었으니까. 김돌쇠는 다시 마부석으로 돌아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이번에는 그 리듬이 방금 전 일을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태평했다. 심지어 발걸음에는 아까보다 더 가벼운 리듬이 붙어 있었다. 돈 몇 푼에 사람 기분이 저렇게까지 좋아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강도현은 마차 문을 다시 닫고 내 맞은편에 앉으며 짧게 사과했다.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내 얼굴에 머물다가 이내 창밖으로 옮겨갔다. 사과의 형태를 갖춘 그 말이 진심인지 의례인지 나는 여전히 판단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나를 방치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했다. 마부의 어깨를 붙잡던 손, 낮게 눌러 담은 목소리,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금전적 처리까지, 그 모든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매끄러웠다. 마치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라는 듯이. '이 남자, 최소한 자기 물건 관리는 확실히 하는군.'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스스로가 나를 물건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씁쓸해졌다. 보호받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 보호의 명분이 나 자신인지 아니면 내가 가진 어떤 '가치'인지가 자꾸만 헷갈렸다.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창밖으로 스쳐가는 어둠 속 나무들을 바라보며 이 남자가 나를 지키는 이유가 정말 순수한 배려인지, 아니면 값비싼 도구를 보호하는 상인의 태도인지를 계속해서 저울질했다. 강도현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자기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채,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옆얼굴의 윤곽이 지나가는 달빛에 잠깐씩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조각 같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싶을 정도로 정갈한 선이었지만, 지금 그런 걸 감상할 정신은 아니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갈 무렵, 저 멀리 지평선 위로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별빛의 연장선인가 싶었는데, 그 빛이 점점 넓어지고 촘촘해지는 걸 보니 결코 자연의 빛이 아니었다. 김돌쇠가 그것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가 왕도 성문이오!" 그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과 안도감이 함께 섞여 있었다. 오랜 여정의 끝이 눈앞에 보인다는 기쁨이겠지. 하지만 성문이라는 단어에 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왕이 있는 곳이라면 결국 내가 그 '역할'을 요구받게 될 장소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마차 안에 웅크린 채 흘러가는 풍경만 바라보면 됐지만, 저 불빛 너머에는 분명히 나를 향한 시선들, 질문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기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마차가 점점 그 불빛을 향해 다가갈수록, 나는 이 여정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손끝을 매만지는 습관만 반복하고 있었다. 강도현의 옆얼굴을 다시 한번 훔쳐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다가오는 성문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침묵이 오늘 밤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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