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저주받은 땅에서 데려온 봄

2화

박덕수가 그 갑옷 입은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역시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향해 짜증을 내던 사람이 순식간에 허리를 굽히며 웃음을 짜내는 모습이라니, 상인이라는 직업은 참으로 얼굴을 몇 개씩 갈아 끼우는 재주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물을 너무 많이 마신다며 이마에 핏대를 세우던 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힌 채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기사님이 이런 데는 어인 걸음이십니까." 기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주변 노예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는데, 나는 그 반응이 두려움에서 온 건지 존경에서 온 건지 헷갈려서 잠시 몸을 움츠린 채 눈치를 살폈다. 옆 우리에 있던 노인 노예 하나는 아예 이마를 바닥에 대다시피 했는데, 그 정도의 반사작용이라면 이 시장에서 기사라는 존재가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 남자를 처음 본 순간의 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눈은 오랜 전투를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피로와 결의가 뒤섞인 색을 띠고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함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성벽의 문처럼 단단해 보였다. 코는 한 번쯤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듯 미묘하게 휘어 있었는데, 그 흠집조차 조각가가 일부러 새겨 넣은 균열처럼 얼굴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어깨를 가로지르는 갑옷의 상처들은 대장장이가 미처 지우지 못한 세월의 흔적처럼 촘촘히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은 적어도 나 같은 걸 재밋거리로 사려는 부류는 아니겠다는 실낱같은 안도가 스몄다. 키는 박덕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그 큰 체구가 시장의 좁은 통로 사이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 지금까지 몇 번이나 속았는지 기억 안 나?' 스스로 그렇게 경계를 다잡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빛을 가진 자를 만나는 게 얼마나 희귀한 일인지, 나는 이미 몸으로 배운 뒤였다. 그가 우리 앞에 서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동안 나는 습관처럼 몸을 옆으로 틀어 가슴이 조금이라도 덜 보이게끔 애를 썼다. 사슬이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따라 움직였고, 나는 그 소리마저 부끄러워서 발끝을 오므렸다. 그 시선이 내 몸의 특정 부위에서 멈추는 순간을 나는 이미 수백 번 겪어봐서 예상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눈은 그런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내 내 눈으로 되돌아왔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숨을 참았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깨달았다. "이 엘프, 상태가 어떻습니까." 상태라니, 마치 가축의 건강을 묻는 듯한 말투에 나는 순간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곧 이 시장에서는 그것이 가장 정상적인 질문이라는 걸 상기하며 마음을 눌렀다. 하다못해 말의 이빨 개수를 세는 사람도 이 정도의 성의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박덕수가 신이 나서 침을 튀기며 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게 좀 특이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손짓까지 보태며 마치 시장 좌판에 진열된 과일의 당도를 자랑하는 사람처럼 떠들었다. 특이한 몸이라니, 그 표현이 마치 흠집 있는 도자기를 파는 상인의 말투 같아서 나는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걸 느꼈지만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박덕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팔을 붙잡아 들어 올리려 했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뒤로 뺐다. 그 순간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미세한 변화가 마치 박덕수의 언사에 대한 불쾌함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그 손 치우시죠." 남자가 낮게 말했다. 박덕수는 뭔가 잘못했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 채 그저 헤헤 웃으며 손을 거뒀는데, 그 눈치 없음이야말로 이 사람의 진짜 재능이 아닐까 싶었다. "직접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그가 우리 안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등이 쇠창살에 닿아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런 요청을 한 자들은 대개 흥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경을 위해서였고, 그 결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나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나.'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춘 채, 놀랍게도 몸이 아니라 손목을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흔적으로 벌겋게 부어오른 손목을 그가 손끝으로 살짝 짚었을 때, 나는 그 손길에서 처음으로 상품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그의 손끝은 갑옷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조심스러웠고, 마치 상처를 후벼 파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의 손 같았다. "언제부터 묶여 있었나." 그가 나에게 직접 물었는데, 물건에게 묻는 말투가 아니라 사람에게 묻는 말투여서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고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박덕수가 대신 나서서 "아, 그게 한 열흘쯤 됐을 겁니다" 하고 얼른 끼어들었지만,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 "이 아이 몸값이 얼마입니까." 그의 물음에 박덕수는 눈을 반짝이며 순식간에 값을 두 배로 부풀렸는데, 그 뻔뻔함에 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상인은 다 똑같구나.' 방금 전까지 손 치우라는 말에 굽신거리던 사람이 저 정도의 뒤끝 없는 배짓을 부릴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 동안 나는 그가 값을 깎으려 흥정을 벌일지, 아니면 그냥 돌아서 버릴지 알 수 없어 속으로 조바심을 냈다. 흥정이 오가는 동안 나는 그저 이 자리에서 값이 매겨지는 물건처럼 앉아 있었고, 결국 그가 지갑에서 백오십 골드를 세어 건네는 걸 지켜보면서도 이게 잘된 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박덕수는 그 돈을 받아 들고는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어찌나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던지 나는 잠깐 그가 나를 판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감정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어나라." 그가 짧게 명령했을 때, 나는 습관처럼 몸을 움츠렸지만 그의 손이 억지로 나를 끌어올리지 않고 그저 기다려주는 걸 보고 조금 당황했다. 지금까지 나를 사고팔던 자들은 대개 팔목을 잡아채든지 발목을 걷어차는 식이었는데, 이 사람은 내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그저 서서 기다렸다. 사슬이 풀리고 손목의 족쇄가 벗겨지는 순간, 나는 오히려 그 자유로움이 낯설어서 손목을 어색하게 문질렀다. 시장을 벗어나 마차로 향하는 길, 자갈이 깔린 길바닥을 걸으며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볼까 고민했다. 뒤에 남겨진 우리 안의 다른 노예들이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가 나지막이 던진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당신이 왕국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국을 구한다니, 나는 방금 팔려나온 노예일 뿐인데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나는 이 남자의 친절 뒤에 숨은 목적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마차 문이 열리고 그가 먼저 올라타라는 손짓을 했을 때, 나는 그 손짓 하나에도 뭔가 거대한 흐름 속으로 발을 들이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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