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면 쓰고 복수하기로 했다

5화

강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다니." 최대한 무심하게 되물었다.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선우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빛을 받는 방식이 조금 다르길래." 강윤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인피면구의 경계선은 자연광 아래에서 아주 미세하게 굴절이 생겼다. 그 정교함의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방금 그 각도는 하필 산등성이의 강한 오후 빛이 정면으로 비치는 순간이었다. 찰나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놓치지 않을 정도의 찰나이기도 했다. 강윤은 선우결의 눈을 살폈다. 그 시선이 자신의 턱선을, 광대뼈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걸 느꼈다. 등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타고난 얼굴이 좀 특이해서." 강윤이 대충 둘러댔다. 선우결은 잠시 강윤을 바라보다가, 별말 없이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그런가 보군."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강윤은 그 짧음 속에 무언가가 걸려 있다는 걸 느꼈다. 선우결은 알아챈 것이다. 적어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강윤은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관자놀이 근처를 슬쩍 매만졌다. 면구는 그대로였다. 어긋난 곳도, 들뜬 부분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선우결이라는 사내는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을 읽어내는 부류처럼 느껴졌다. 산길이 완만해지며 저 멀리 마을의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낮게 깔린 저녁빛. 둘은 마을로 들어섰다. 저녁 무렵의 마을은 시끌시끌했다. 장사꾼들이 좌판을 정리하고 있었고,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녔다. 기름에 튀긴 음식 냄새, 말똥 냄새, 젖은 흙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저잣거리 한쪽에서는 포목상이 목청을 높이며 마지막 손님을 부르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대장간의 쇠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선우결은 그 소란 속에서도 걸음의 방향을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골목의 구조를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자주 오는 곳이오?" 강윤이 물었다. "몇 번." 선우결이 짧게 대답했다. 더 캐물을 여지를 주지 않는 대답이었다. 선우결이 안내한 객잔은 마을 중심가에 있었다. 이층 목조 건물로, 처마 끝에 등이 걸려 있었다. 등에는 붉은 천이 씌워져 있어서, 저녁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 그림자가 처마 아래로 흔들렸다. "여기가 그나마 깨끗한 곳이오." 강윤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나무 탁자와 낮은 등불, 술 냄새와 국밥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바닥은 오래 닦아온 흔적이 있는 짙은 색이었고, 벽에는 낡은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다. 산수화였는데, 색이 다 바래서 무슨 산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선우결이 점소이를 불러 술과 요리를 시켰다. "이런 곳에서 신세 지는 김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강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물어보시오." "방금 그 진동, 기연이라고 했소. 그게 정확히 뭔지 아시오?" 선우결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확실친 않소. 다만 최근 이 지역 여기저기서 그 진동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 중 몇은 갑자기 실력이 부쩍 늘었다는 얘기가 돌지." "소문의 근원은?" "모르오. 다만 조심스레 캐묻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강윤은 그 말을 곱씹었다. 시스템의 존재가 완전히 비밀은 아닌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이미 그 진동을 감지하고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점소이가 술병과 함께 나물 무침, 삶은 돼지고기를 내왔다. 선우결이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 진동을 느낀 이들 중 몇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얘기도 있소." "자취를 감췄다니?" "사라졌다는 뜻이오. 어디로 갔는지, 누가 데려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강윤의 손끝이 살짝 굳었다. 시스템을 얻은 이들이 노려지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당신도 그 소문 때문에 산에 온 거였소?" "그건 아니오. 나는 다른 일로 지나가던 길이었소." 선우결이 술을 한 잔 들이켰다. 대답이 너무 매끄러웠다. 강윤은 그 매끄러움이 더 마음에 걸렸다. 사람은 보통 거짓말을 할 때 조금이라도 머뭇거린다. 선우결의 대답에는 그 머뭇거림이 없었다. 오히려 이미 몇 번이고 연습한 대답처럼 들렸다. "다른 일이라면." 강윤이 슬쩍 캐물었다. "궁금하시오?" 선우결이 되물었다.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먼저 물은 쪽이 대답할 차례 아니오." "먼저 물은 쪽이 이름을 밝히는 법이라고도 하던데." 강윤은 말문이 막혔다. 이 사내는 질문을 되받아치는 데 능숙했다. 마치 상대의 질문을 그대로 거울처럼 되비추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그때, 객잔 문이 벌컥 열렸다. 한 여인이 급히 들어섰다. 옷차림이 단정했지만, 뛰어온 듯 숨이 가빴다.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고, 옷자락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 "선우 공자님!" 선우결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오." "유가 소저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이번 시 대회 소식을 전하라 하셨어요." "시 대회?" 선우결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유서은 소저께서 이번 달 보름에 시 대회를 개최하신다고, 널리 인재를 모으고 있다 하셨습니다. 상금과 함께, 소저의 후견도 함께 주어진다고요." "유서은 소저가." 선우결의 표정이 흥미롭게 바뀌었다. 여인이 숨을 고르며 덧붙였다. "이번에는 각지에서 문사들이 몰려들 거라 소문이 자자합니다. 벌써부터 준비하는 이들이 많다고요." "알겠소. 전해줘서 고맙소."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치맛자락이 문턱을 스치며 흔들렸다. 선우결이 강윤을 돌아봤다. "유가 소저를 아시오?" "모르오." "용모가 뛰어나고, 문재가 깊은 걸로 유명한 분이오. 이 근방에서 열리는 시 대회 중 가장 큰 규모지. 매번 그 대회를 통해 이름을 얻은 문사들이 여럿 있소." 강윤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할 건 시 대회 같은 것보다, 산적 잔당과 흑풍맹의 정체였다. 유서은이라는 이름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소리로만 들렸다. "그보다, 그 산적들이 숨어 있던 곳을 알아낼 방법이 있소?" 선우결이 눈을 반짝였다. "흥미가 생겼소?" "뒤를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산적이라 하기엔, 움직임이 너무 정돈되어 있었소." 선우결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방금까지의 여유로운 표정 위로, 미묘한 진지함이 겹쳐졌다. "그럼 같이 가보지." 선우결이 뜬금없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가는 게 낫소. 밤에는 산적들의 눈이 더 밝아지니까." 강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쯤 남은 술잔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서둘러 객잔을 나섰다. 둘은 다시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선우결이 앞서 걸으며 지형을 짚어갔다. 놀랍도록 정확했다. 마치 이 지역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갈림길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골랐고, 나무뿌리가 튀어나온 곳에서는 미리 발을 옮겨 피했다. "이쪽에 낡은 광산이 있소. 예전에 폐광이 됐는데, 요즘 그 근방에서 사람 기척이 자주 느껴진다는 얘기가 있었지." "거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확신이 없었으니까." 강윤은 그 대답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 확신이 없어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치고는, 지금의 걸음걸이는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다. 두 사람은 산길을 다시 올랐다. 저녁 어스름이 나무 사이로 깔렸다. 새소리가 하나둘 잦아들고, 대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마른 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강윤은 숨을 낮추고 걸음의 폭을 줄였다. 선우결도 마찬가지로 소리를 죽인 채 움직였다. 한참을 오르자, 나무들 사이로 검은 구멍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폐광 입구는 나무덩굴로 가려져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최근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 눌린 풀. 선우결이 손짓으로 강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입구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덩굴을 걷어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아무 기척도 없소." 낮은 목소리였다. 강윤이 먼저 들어섰다. 곰팡이 냄새, 오래된 흙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사람 냄새. 동굴 안은 어두웠다. 벽을 짚은 손끝에 축축한 냉기가 스몄다. 발밑으로는 오래된 나무 갱도 판자가 삐걱거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낡은 목재 궤짝이 놓여 있었다. 궤짝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자물쇠 부분만은 유독 반질거렸다. 최근에 여러 번 여닫힌 자국이었다. 강윤이 궤짝의 뚜껑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동굴 벽에 울렸다. 궤짝을 열자, 무기와 식량, 그리고 몇 장의 서류가 보였다. 칼자루가 여러 개, 화살촉이 든 자루, 마른 육포와 곡식 부대.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접힌 종이 뭉치. 강윤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낡은 종이였다. 접힌 자국이 여러 번 있었다. 손끝으로 펼쳐보니, 글씨는 흐릿했지만 숫자와 지명 같은 것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물품의 목록처럼 보이기도 했고, 인원 배치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류 사이에서 작은 목패가 떨어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흙바닥에 떨어졌다. 강윤이 허리를 굽혀 집어 들었다. 검은 바탕에 붉은 문양. 늑대의 발톱을 형상화한 문양이었다. 선우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건." "뭐요." 강윤이 목패를 들어 선우결 쪽으로 내밀었다. 등불도 없는 어둠 속에서, 붉은 문양만이 유독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선우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길었다. 강윤은 그 침묵의 무게를 느끼며 기다렸다. "흑풍맹의 증표요. 단순 도적단이 아니었단 소리지."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느 때의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차 있었다. "흑풍맹이 뭐요." 강윤이 물었다. 선우결은 잠시 대답을 미뤘다. 마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표정이었다. "이 근방에서 암암리에 세력을 넓혀가는 조직이오. 표면적으로는 상단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여러 가지를 손대고 있지. 도적질, 밀수, 그리고—" 선우결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기연을 얻은 이들을 쫓는다는 얘기도 있소." 강윤의 손끝이 목패를 쥔 채로 미세하게 떨렸다. 산적 잔당과 시스템의 진동,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 모든 것이 하나의 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강윤은 목패를 손에 쥔 채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동굴 벽의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산적들의 정체가 이제 명확해졌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우연한 도적질이 아니었다. 이건,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짜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조직이 노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강윤 자신이 얻은 그 진동일지도 몰랐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