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면 쓰고 복수하기로 했다

2화

빛이 먼저 왔다. 붉은 빛이었다. 눈꺼풀 안쪽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다음 무게가 왔다. 등이 무거웠다. 팔이 무거웠다. 손끝이 무거웠다. 강윤은 손끝을 움직였다. 움직였다. 손가락이었다. 실제로 있는, 살로 된 손가락이었다. 숨을 쉬었다. 숨이 들어왔다. 폐가 부풀었다. 심장이 뛰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낯선 박동인데 익숙했다. [시스템 재접속 완료.] [개체명: 강윤. 신체 복원 완료.] [입령기 5단계로 초기화되었습니다.] 강윤은 눈을 떴다. 낡은 나무 천장이 보였다. 갈라진 틈으로 빛이 새어 들었다. 먼지가 그 빛줄기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낡은 침상이었다. 마른 풀 냄새가 났다. 곰팡이 냄새도 섞여 있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 습한 흙냄새. 전부 낯선 냄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없었다. 두 손을 눈앞에 들어 보았다. 자기 손이 아니었다. 손가락 마디가 더 굵었다. 손등에 작은 흉터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마치 원래 이 몸으로 살아온 사람 같은 기억이, 지식이, 감각 밑에 깔려 있었다. 검을 쥐는 법. 말을 타는 법. 산길을 걷는 법. 전부 몸이 이미 알고 있었다. 강가(姜家) 삼남 강윤.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동시에 다른 감정도 함께 올라왔다. 분노. 오래 묵은, 삭힌 분노. 기억이 조각조각 밀려들었다. 큰형의 냉소. 둘째 형의 무시. 아버지의 무관심. 어미가 첩실이었다는 사실. 그 신분 때문에 받았던 대우들. 연회에서 뒷자리로 밀려나던 순간. 무예를 배우고 싶다 청했을 때 돌아온 비웃음. 강윤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과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속이 울렁거렸다. "강씨 가문."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자기 목소리인데도 낯설었다. 원래 강윤의 목소리가 이랬을까. [직업 선택 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반투명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번엔 오류 없이 깨끗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검객] [궁사] [술사] [약사] 각 항목 아래 작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검객 — 근접 전투에 특화. 성장이 빠르나 위험도 높음. 궁사 — 원거리 견제 가능. 초반 생존율 높음. 술사 — 술법 운용. 마력 소모 자원 관리 필요. 약사 — 회복 및 보조 특화. 전투력 낮음. 강윤은 잠깐 훑어보았다. 하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검객을 눌렀다. [검객으로 전직하였습니다.] [초급 무공 '무상검법'을 획득하였습니다.] [전용 무기 '무상검'을 획득하였습니다.] 허공에서 빛이 뭉치더니 손안으로 떨어졌다. 손안에 무게가 실렸다. 검이었다. 소박한 자루, 무늬 없는 검신. 하지만 쥐는 순간 손목까지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피가 검을 따라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강윤은 웃었다. "이거 진짜 게임이네." 혼자 중얼거리고는 검을 몇 번 휘둘러 보았다. 수평으로 한 번. 대각선으로 한 번. 위에서 아래로 한 번.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자세가 잡혔다. 기억에는 없는데 몸은 알고 있었다. 검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바람 소리가 났다. 낮고 예리한 소리였다. 강윤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아니, 검집이 없었다. 그냥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그는 검을 허리춤에 어색하게 끼워 넣었다. 그는 방을 나섰다. 낡은 오두막이었다. 산 중턱, 인적 드문 곳. 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소나무 냄새가 짙었다. 발밑으로 부러진 나뭇가지가 밟혔다. 마른 소리를 냈다. 왜 이런 곳에 홀로 있었는지, 원래 몸의 기억이 조금씩 흘러들었다. 가문에서 내쳐진 몸이었다. 삼남이라는 자리는 계승권과도 거리가 멀었고, 어미의 신분도 낮았다. 형들의 견제 속에서 결국 변방으로 쫓겨났다. 정확히는, 쫓겨난 게 아니었다. 버려진 것이었다. 가주가 죽고 큰형이 가문을 이었을 때, 강윤은 이름 없는 산자락에 처박혔다. 명목은 수련이었다. 실제로는 유배였다. 호위도 없었다. 시중도 없었다. 그저 오두막 한 채와 최소한의 식량만 남겨졌다.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강윤은 숨을 한 번 내쉬며 그 감정을 눌러 앉혔다. 지금 이 몸의 원주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강윤이 이 몸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몸의 주인과 강윤이 겹쳐진 것일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지금은 복수보다 생존이 먼저였다. 오두막을 나서 산길을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나뭇잎 밟는 소리. 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윤은 걸음을 멈췄다.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규칙적이지 않았다. 하나는 무겁고, 다른 하나는 가벼웠다. 숫자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최소 두 명, 어쩌면 셋. 덤불 사이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낡은 가죽 갑주, 허리에 찬 곡도. 중년의 사내였다. 얼굴에 흉터가 하나 있었다. 오른쪽 눈썹부터 턱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 강윤은 나무 뒤로 몸을 숙이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늦었다. 사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상 확인: 산적. 입령기 3단계.] 시스템이 알려주었다. 강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3단계. 방금 재초기화된 자신의 5단계보다 낮은 수치였다. 하지만 그 수치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세계의 법칙을 아직 몸으로 겪어보지 못했다. 사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오두막에 사람이 있었나." 강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편이 나았다.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버려진 곳이라고 들었는데." 사내가 한 발짝 다가왔다. 뒤쪽 덤불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내의 손이 곡도 손잡이로 갔다. "금붙이나 좀 가지고 있으면 순순히 내놓지." 강윤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심장이 다시 빨라졌다. 조금 전 눈을 떴을 때의 박동과는 다른 종류의 빠름이었다. "없는데." 짧게 대답했다. 사내가 웃었다. 흉터가 일그러졌다. 웃음소리가 산속에 낮게 퍼졌다. "없으면 몸으로 갚아야지." 곡도가 뽑혔다. 빛이 칼날에 미끄러졌다. 날카로운 빛이었다. 강윤은 검을 앞으로 겨눴다. 자세가 낮았다. 무게 중심이 앞발에 실렸다. 몸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사내가 먼저 달려들었다. 곡도가 대각선으로 떨어졌다. 강윤은 옆으로 몸을 틀었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훈련받은 적 없는 동작인데도 매끄러웠다. 바람이 뺨을 스쳤다. 곡도가 그만큼 가까이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곡도가 허공을 갈랐다. 강윤은 그 틈에 검을 휘둘렀다. 손목이 저릿했다. 검이 사내의 팔을 스쳤다. 피가 튀었다. 붉은 방울이 흙바닥에 떨어졌다. 몇 개는 강윤의 옷자락에도 튀었다. 사내가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애송이가 손버릇이 있네." 목소리에 노기가 섞였다. 팔뚝에서 피가 흘러 손목을 타고 곡도 손잡이까지 적셨다.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더 빨랐다. 강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검과 검이 부딪혔다. 쇳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그 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사내의 곡도가 어깨를 노렸다. 강윤은 몸을 낮췄다.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 동작을 언제 배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무상검법 - 일섬(一閃)] 검신이 하얗게 빛났다. 그 빛이 눈을 순간 멀게 했다. 사내의 목이 그대로 베였다. 피가 뿜어졌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사내의 몸이 무너졌다. 머리가 떨어져 흙바닥을 굴렀다. 눈은 아직 뜬 채였다.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 있었다. 강윤은 검을 내렸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감각이 늦게 찾아왔다. 속이 뒤틀렸다. 위액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강윤은 고개를 돌리고 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하지만 곧 가라앉혔다. 이곳은 그런 세계였다. 망설이면 자신이 저 자리에 눕는 세계. [산적 처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의 메시지가 무심하게 떠올랐다. 사람의 목숨 하나가 숫자 몇 개로 환산되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강윤을 더 진정시켰다. 강윤은 검을 옷자락에 슥슥 문질러 피를 닦았다. 완전히 닦이지는 않았다. 붉은 얼룩이 검신에 배어들었다. 시신 쪽으로 다가갔다. 품 안을 뒤지려는 순간, 사내의 손에서 무언가 타고 있는 게 보였다. 작은 부적이었다. 이미 반쪼가리는 재가 되었다. 누런 종이 위에 붉은 글씨가 반쯤 남아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었다. 점처럼 찍힌 것도 있었고 곡선으로 이어진 것도 있었다. "…이건 뭐지." 강윤은 손을 뻗었다. 뜨거웠다. 손끝을 갖다 대는 순간 열기가 느껴졌다. 부적이 다 타기 직전, 붉은 빛이 한 번 번쩍였다. 웅— 산 전체가 그 진동을 느낀 것 같았다. 나뭇잎이 일시에 흔들렸다.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멀리서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가 곧 끊겼다. 강윤은 그 빛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감이 좋지 않았다. 연락이었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그리고 방금, 그 연락이 성공적으로 도달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부적은 이내 재로 흩어져 바람에 날렸다. 검은 재가 강윤의 발치까지 흘러왔다. 강윤은 남은 시신을 뒤졌다. 은자 몇 냥, 마른 육포 한 조각, 낡은 단검 하나가 나왔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품속에서 다른 부적은 나오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강윤은 고개를 들었다. 산 아래쪽, 나무들 사이로 낯선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다. 분명 방금까진 없던 것이었다.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공기의 흐름 같은 것이었다.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강윤은 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경계였다. 아까 그 사내는 그저 산적이었다. 하지만 이 기척은 달랐다. 더 무겁고, 더 조용했다. 숲의 색이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초록이 어딘가 짙어진 것 같기도 했고, 그늘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의 신호였다. 강윤은 오두막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저 안으로 몸을 숨겨야 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맞서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가 천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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