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면 쓰고 복수하기로 했다

4화

협곡 위에서 내려온 목소리는 낮고 여유가 있었다. 울림이 바위벽을 타고 두 번 튕겨 내려왔다. 산적들의 시선이 순간 흔들렸다. 넷의 어깨가 동시에 굳었다. "누구냐." 앞선 사내가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대답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발소리가 먼저 왔다. 자갈을 밟는 소리, 흙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정확한 박자로 이어지는 걸음. 그 낯선 남자는 천천히 절벽길을 내려왔다. 걸음마다 흙먼지가 소리 없이 밟혔다. 경사가 급한 길이었다. 발밑을 확인하지 않고도 흔들림 없이 내려오는 걸음걸이였다. 강윤은 그 걸음을 보며 생각했다. 이 지형을 처음 보는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오." 남자가 마지막 걸음을 내려서며 말했다.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지나가던 놈이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끼어드는 걸 좋아해서." 그가 웃으며 검을 뽑았다. 검신이 맑았다. 빛이 거의 없는 협곡 안에서도 검신은 스스로 빛을 머금은 듯 희게 번쩍였다. 강윤은 그 검을 보는 순간 알았다. 저건 흔한 무기가 아니었다. 날의 결이 달랐다. 강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섞인 광택이었다. [대상 확인 중...] [대상: 선우결. 입령기 7단계.] 시스템이 알려준 숫자에 강윤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7단계. 산적들과는 격이 달랐다. 강윤이 지금까지 느낀 산적 넷의 기운은 입령기 3단계에서 4단계 사이였다. 개별로도 벅찬 상대들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넷을 합친 것보다도 벽이 더 두꺼웠다. 산적 넷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계산이 빠르게 오갔다. 눈빛으로 나누는 대화였다. 물러날지, 밀어붙일지. "우리가 먼저 온 사냥감이다. 끼어들지 마라." "사냥감이라기엔 좀 잘 싸우는 사냥감이던데." 선우결이라 불린 남자가 강윤을 슬쩍 쳐다봤다. 짙은 눈매였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계산이 빨랐다. 강윤의 옷차림, 검을 쥔 손의 위치, 다리의 각도까지 한 번에 훑고 지나가는 시선이었다. 산적들이 결국 몸을 돌렸다. 넷이 함께 상대하기엔, 7단계라는 벽이 컸다. 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격이 다른 상대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난다. 다음엔 이렇게 안 끝난다." 한 명이 그렇게 내뱉고 넷은 협곡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바위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들이 마지막까지 강윤 쪽을 흘겨보았다. 협곡에 남은 것은 강윤과 선우결, 둘뿐이었다. 바람 소리만 협곡 벽을 타고 오르내렸다. 강윤은 검을 내리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서 방심할 이유는 없었다. 7단계라는 숫자는 안전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위험일 수도 있었다. 선우결이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동작이 매끄러웠다.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한 손놀림이었다. "고맙단 말은 안 하나." "이유 없이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고 배웠는데." "틀린 말은 아니군." 선우결이 웃었다. 그리고 강윤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치 강윤이라는 사람 자체를 읽으려는 눈빛이었다. "신기하게, 아까 산 위에서 이상한 진동을 느꼈소. 그쪽에서 나던 것 같은데." 강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시스템이 반응할 때 나던 그 진동을 이 남자가 느꼈다는 뜻이었다. "그런 진동, 요즘 이 근방에서 몇 번 느꼈지. 새로운 기연을 얻은 사람들에게서 나는 거라던데." 강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시스템의 존재를 느낀 걸까.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확인하려고 온 건 아니오. 우연히 지나가다 들은 것뿐이지." 선우결이 손을 들어 보였다. 적의가 없다는 뜻이었다. 손바닥이 넓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검을 오래 쥔 손이었다. "이름은?" 강윤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름을 밝히는 건 흔적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이한별." 가명이었다. 필요할 때를 대비해 원래 몸의 기억 속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이 정도로는 추적이 어려울 것이었다. 원래 몸의 기억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선우결." 그도 이름을 밝혔다. "선우가 외아들이라면, 들어본 적 있는데." 강윤은 원래 몸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어렴풋한 정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선우가 맞소." 선우결이 짧게 웃었다. 강윤은 그 이름에 담긴 무게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원래 몸의 기억 속에, 선우가는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무가였다. 대대로 검을 다루는 가문. 그 이름 하나만으로 이 지역 웬만한 문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산속에서 뭘 하고 있었소." "쫓기고 있었소. 방금 봤듯이." "그전엔." 강윤은 대답을 고르며 선우결의 표정을 살폈다. 상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탐색이 섞여 있었다. 무엇을 알아내려는 걸까. 강윤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살아 있었소." 짧은 대답이었다. 선우결이 미소를 지웠다가 다시 지었다. 그 잠깐의 정지가 오히려 눈에 밟혔다. "재밌는 사람이군." 두 사람은 협곡을 벗어나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길은 좁았다. 나뭇가지가 낮게 늘어져 있었고, 발밑에는 마른 잎이 바스락거렸다. 걸으면서 선우결이 물었다. "방금 그 검법, 초식 이름이 뭐요." "모르는 게 낫지 않겠소." "숨기는 게 있으면 더 알고 싶어지는 법인데." "그건 당신 문제고." 선우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산길을 타고 울렸다. "말투가 딱딱한데 겁은 없군." "겁이 없는 건 아니고, 지금은 겁낼 여유가 없는 거요." 선우결은 강윤을 잠시 응시했다.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저 지나가다 도와준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 시선에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흥미와 경계가 반쯤 섞인 빛이 있었다. "흑풍맹이 요즘 이 근방에서 자주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소. 방금 그 다섯도 그쪽 패거리일 가능성이 크지." "흑풍맹." 강윤은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하지만 원래 몸의 기억 속에는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이 지역 뒷골목을 장악한 조직. 검은 깃발, 낮에는 숨고 밤에 움직이는 무리. 몇몇 상단이 그들에게 통행세를 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단순 산적단이 아니란 뜻이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요. 확신은 아니고." 선우결이 걸음을 멈췄다. 산등성이 끝에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작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녁 짓는 연기가 몇 군데서 올라오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거처가 없으면 저 마을에 잠시 머무는 게 어떻소. 내가 아는 객잔이 있는데." 강윤은 잠시 망설였다. 도움을 받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얽히는 건 부담이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선우결이라는 이 남자는 지나치게 예리했다. 방금 나눈 몇 마디로도 그것이 느껴졌다. "신세는 안 지고 싶소만." "신세라기보단, 그냥 방향이 같아서. 나도 마침 저기 가는 길이었소." 거짓말이 뻔했지만, 강윤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안전한 곳이 필요했다. 몸도 지쳐 있었다. 협곡에서의 싸움으로 소진된 기운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둘은 함께 산길을 내려갔다. 발밑으로 흙과 자갈이 섞인 좁은 길이 이어졌다. 저물어가는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걷는 동안 선우결이 몇 번이나 강윤의 옆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이 강윤의 얼굴, 정확히는 얼굴 윤곽의 경계선쯤을 훑고 지나갔다. 한 번은 아무렇지 않게, 또 한 번은 조금 더 오래. 강윤은 그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했다. 인피면구는 정교했다. 웬만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선우결의 눈빛은 어딘가 달랐다. 그 눈은 그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림 뒤의 붓질을 읽으려는 눈이었다. 산길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선우결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얼굴이, 조명 각도에 따라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데." 강윤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 사이로 선우결의 시선이 다시 강윤의 얼굴 위에 멈춰 섰다. 산 아래 마을의 불빛이,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서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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