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 안 하면 죽습니다

2화

사파이어가 손끝을 태울 듯이 뜨거워진 건, 정확히 내가 흑암숲 안쪽으로 백 걸음쯤 더 들어섰을 때였다. 그 전까지는 그냥 평범하게 미지근한, 손난로만도 못한 온도였는데, 백 걸음을 기점으로 뭔가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확 달아올랐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목걸이를 벗어 손바닥에 올려놨는데, 그 순간 눈앞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경고: 각성 매개체의 활성화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지금 즉시 혈액을 공급하지 않으면 자연 방출로 전환됩니다.] [자연 방출 시, 사용자의 생명력에 위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게, 지금 하라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주머니 속 커터칼을 꺼냈다. 사실 훈련 중에 다치는 일이 잦다 보니, 나는 늘 자잘한 응급처치용 도구를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오늘만큼은 그 습관이 결정적으로 유용해졌다. 반창고나 소독약 따위를 챙겨 다니는 게 이렇게 쓸 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인생, 참 알 수가 없다. 칼날을 엄지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자잘한 상처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스스로 살을 긋는다는 행위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생명력에 위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문을 다시 한번 읽고 나니, 그 망설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차피 나는 시한부였다. 몇 달 뒤에 죽을 몸이었으니, 손가락 하나 긋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칼날을 슥, 그었다. 투둑. 피 한 방울이 사파이어 표면에 떨어지는 순간, 돌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안에서부터 새파란 빛을 뿜어냈고,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손끝이 저릿저릿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는 나 자신도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서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할 때, 그 두 감정은 대체로 함께 오는 법이니까. [각성 매개체가 사용자의 혈액을 인식했습니다.] [등급 판정을 시작합니다...] [판정 중... 판정 중... 판정 중...] '등급 판정이라니, 뭔가 게임 같은데?'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감상을 곱씹을 여유도 없이 몸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각이 밀려들었다. 표현하자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을 때 느껴지는 열감과 비슷했는데, 그 열이 피부가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올라온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마치 골수 하나하나에 뜨거운 물을 주사기로 주입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이를 악물었고, 숨을 몰아쉬며 이 감각이 대체 언제 끝날지를 가늠하려 애썼다. '판정 중'이라는 문구가 세 번째로 떠올랐을 때,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은행 대기 번호도 아니고, 판정 중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알려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물론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직 통증이 견딜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직후부터는 그런 여유로운 생각 따위 할 틈이 없어졌으니까. 파직...! 파지직...! 귓가에서 정전기 튀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는데, 그 소리는 실제로 내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손끝에서부터 옅은 청색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걸 목격한 순간, 나는 이게 단순한 각성 의식이 아니라 정말로 몸 안에 뭔가를 새로 심는 과정이라는 걸 실감했다. 등에서부터 어깨, 팔, 손끝까지 스파크가 타고 내려가는 그 경로가 마치 지도를 그리듯 선명하게 느껴졌고, 나는 그 감각이 지나갈 때마다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진짜 죽는 거 아니야?' 하는 불안이 스쳤지만, 이상하게도 겁이 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시한부인 몸, 여기서 잘못돼서 죽는다 해도 그건 그냥 예정보다 조금 빨리 오는 결말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니 통증도 조금은 견딜 만해졌달까.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체감상으로는 십 분은 족히 넘은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짧았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시간 감각이 늘어지기 마련이니까. [판정 완료.] [사용자 등급: E] [※ 참고: E등급은 일반적인 초기 각성자 평균 등급입니다.] [보상: 소환용 반지 '작은 서약'이 지급됩니다.] 왼손 약지에 서늘한 금속 감각이 스치는 걸 느낀 나는 시선을 내려 손을 확인했는데, 거기엔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은빛 반지가 껴 있었다. 반지 표면에는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이 사파이어와 똑같은 청색으로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가락 크기도 정확하게 맞아서, 마치 원래부터 내 손을 재서 만든 것처럼 딱 맞았다. 'E등급이라니, 그것도 평균이라니... 뭔가 대단한 능력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조금 서운한데'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는 죽지 않고 이 각성을 완료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했으니까. 시한부 목숨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먼저였고, 등급이 낮다는 실망은 그 다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남은 시간을 계산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흑암숲 한복판에 주저앉아서 등급이 낮다고 투덜대고 있으니.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반지를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돌려보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검을 떠올려봤다. 그러자 반지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손안에 서늘한 무게감이 자리 잡았다. 촤아악. 한 자루의 청백색 검이 허공에서 형태를 갖추는 순간,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게, 되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 검신은 조금 투명해 보였고,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도 실제 강철보다는 훨씬 가벼웠지만, 확실히 실체가 있는 무기였다. 나는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무게 중심을 가늠했는데, 생각보다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손목이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검을 없애볼까 생각했더니, 정말로 손안에서 스르륵 사라지고 다시 반지의 문양만 옅게 빛났다. 그러다 다시 소환하니 또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거 완전 인벤토리 시스템인데?' 싶은 생각이 들면서, 나는 잠깐 이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시한부 판정을 받은 평범한 이십 대였는데, 지금은 손짓 한 번으로 검을 소환하는 각성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시험 삼아 앞에 있는 나무 등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그작!! 등걸이 반으로 쪼개지며 튕겨 나가는 소리가 숲 전체에 울렸는데, 그 파괴력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서, 나는 잠시 검을 든 손을 내려다보며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쪼개진 등걸의 단면은 마치 톱으로 잘라낸 것처럼 매끈했고, 그 주변으로 옅은 청색 잔광이 잠깐 남아 있다가 스르르 흩어졌다. '이게, E등급의 힘이라고?'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다시 근처에 있던 조금 더 굵은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러봤는데, 이번에도 별다른 저항 없이 쩍, 하고 갈라졌다. 물론 내가 무술 훈련을 오래 받았던 몸이라 그 기본적인 스텝과 힘 전달이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E등급이 이 정도라면, 대체 상위 등급은 얼마나 강한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새로 생겨났다. D등급은 이것보다 얼마나 더 강할까, C등급은, B등급은... 상상을 이어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씩 웃고 있었다. 죽다 살아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반응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궁금증에 답이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걸이 쪼개지는 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숲 깊은 곳에서 낮고 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으어어어엉— 그 소리는 분명, 내가 지금까지 흑암숲에서 들어본 어떤 소리보다도 무거웠다. 마치 땅 밑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배 속을 뒤흔드는 저음이었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다시 힘주어 잡았다. 방금까지 신기하다고, 재밌다고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설마, 방금 그 소리, 나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그런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나무들 사이로 뭔가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