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를 살리려, 악마와 계약했다

4화

정오. 서쪽 폐허. 폐허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이었다. 무너진 건물의 뼈대만 몇 개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회색 먼지가 일었다. 그 먼지 사이로 박대박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 나왔다. "왔네, 원아이." 박대박이 말했다. "눈 하나로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눈 하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왼쪽 안구가 있던 자리가 욱신거렸다. 실제로는 아픈 곳이 아니었다. 신경이 끝난 자리였다. 그런데도 아팠다. 통증이라는 게 몸이 아니라 기억에서 오는 거라면, 나는 평생 그 자리를 앓게 될 거였다. "오늘은 눈 두 개 다 가져갈까." 박대박이 웃으며 검을 뽑았다. 검이 뽑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쇠와 쇠가 스치는 소리. 그 소리 하나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그보다 낮고 무거운 진동이었다. 곽두식과 차동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원숭이 다섯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혹시 모를 매복을 경계하는 자세였다. 곽두식이 한 손으로 차동이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차동이는 빨간 모자를 눌러쓴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차동이가 입 모양으로 뭔가 말했다. 이겨. 그 두 글자를 읽는 순간 목이 마르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 목이 말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규칙은." 내가 물었다. "규칙 같은 게 있겠어." 박대박이 웃었다. "먼저 쓰러지는 놈이 지는 거지." 너무 간단한 규칙이었다. 간단하다는 게 오히려 무서웠다. 규칙이 없다는 건 뭐든 해도 된다는 뜻이고, 뭐든 해도 된다는 건 이쪽도 뭐든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손목에 감춰둔 침이 만져졌다. 차갑고 얇은 감촉. 이걸 쓰는 순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시작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감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정오 12시 1분. 첫 칼이 왔다. 빠르다는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옆으로 몸을 틀었다. 칼끝이 옷깃을 스쳤다. 옷감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살이 아니라 옷이 잘렸다는 사실에 안도할 새도 없이 다음 칼이 왔다. 정오 12시 3분. 두 번째 칼. 이번엔 발목을 노렸다. 간신히 피했다. 발목을 노렸다는 건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쓰러뜨리려는 거였다. 쓰러진 상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뻔했다. 발목이 아니라 목을 노렸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박대박은 아직 나를 가지고 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빠른데." 박대박이 감탄한 척 말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피할 거야." 대답할 힘도 아까웠다. 숨을 짧게 끊어 쉬며 다음 칼을 기다렸다. 정오 12시 5분. 세 번째 칼. 이번엔 정면이었다. 피할 곳이 없었다.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칼끝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 안에서, 온갖 계산이 지나갔다. 피할 각도, 남은 거리, 침을 튕길 손목의 위치. 모든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결론을 내렸다. 나는 손목에 숨겨둔 침을 튕겼다. 독이 묻은 침이었다. 박대박의 손목에 정확히 박혔다. 바늘 하나가 살에 박히는 소리는 원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순간엔 뭔가 박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어이." 박대박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잔재주." "잔재주라도 통하면 된 거야."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평소보다 낮고, 평소보다 차가웠다. 누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독은 즉효가 아니었다. 서서히 힘을 뺏는 종류였다. 마비독. 손끝부터 무뎌지기 시작하는 독. 서은을 데려오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언제 쓸지 정해두지 않았던 카드. 쓸 일이 없기를 바랐던 카드. 결국 오늘 썼다. 박대박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검을 휘둘렀다. 12시 8분. 검이 조금씩 느려졌다. 느려졌다는 걸 나만 느끼고 있었다. 박대박은 아직 자기 힘을 자기 힘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였다. 12시 11분. 박대박의 팔이 살짝 떨렸다. 떨림을 본 순간,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거리를 벌리는 게 먼저였다. 지금 다가가면 마지막 힘으로라도 나를 벨 수 있었다. 독이 다 퍼질 때까지 버티는 게 이 싸움의 전부였다. "왜 자꾸 도망가." 박대박이 이를 갈며 물었다. "겁먹었어?" 겁이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그런데 그 계산과 겁 사이의 차이를 설명해줄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12시 14분. 박대박이 검을 놓쳤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폐허에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신호탄 같았다. 곽두식이 옅게 숨을 내쉬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차동이가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뭐야, 이거." 박대박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방금까지 노래를 흥얼거리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사람은 자기 몸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때 가장 먼저 두려움을 배운다는 걸,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독." 내가 말했다. "침에 발라놨어. 넌 처음 칼을 뽑을 때부터 이미 진 거야." 박대박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이거 반칙 아니야?" "규칙이 없다고 했잖아." 내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느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순간이었다. 나는 마비된 박대박의 목에 검을 겨눴다. 손이 떨렸다. 검 끝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였다. 박대박도 그걸 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 이제 그쪽이었는데, 검이 떨리는 건 내 손이었다. 죽이는 게 조건이라면 죽여야 했다. 그런데 야현은 죽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겨." 라고만 했다. 이겨라는 말과 죽여라는 말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 나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계속 재고 있었다. 이긴다는 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완전히 지워야 이긴 게 되는 건가.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은 안심시켰다. 그 차이가 뭘 의미하는지 그 순간엔 몰랐다. "이겼어." 내가 검을 내리며 말했다. 검을 내리는 손이 여전히 떨렸다. 박대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힘조차 독이 가져간 모양이었다. 야현이 그 말과 동시에 눈앞에 나타났다. 박대박도, 곽두식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오직 나만 봤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등장에는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발소리도 없었다. 그냥 있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확인." 야현이 말했다. "첫 번째 조건 완료." 그 말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긴장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두려움이었거나. 정확히 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때까지 나를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풀려나갔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서은을 데려올 수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몸에 새겨졌다. 서은.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얼마 만에 떠올리는 이름인지 셀 수도 없었다. 매 순간 떠올리고 있었으면서도, 정말로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마." 언젠가 서은이 잠결에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형!" 차동이의 목소리였다. 다급했다. 세상의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안도감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박대박의 부하 하나가 매복해 있었다. 결투 중에 몰래 숨어든 자였다. 칼이 이미 차동이의 목을 향해 그어지고 있었다. 원숭이 다섯이 왜 막지 못했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숫자만 있다고 매복을 다 잡아내는 게 아니었다. 그 짧은 진리를 지금, 가장 나쁜 방식으로 깨닫고 있었다. "차동이!" 곽두식이 몸을 던졌다. 늦었다. 늦었다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됐다. 늦었다. 늦었다. 늦었다. 피가 튀었다. 빨간 모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빨간색이 두 개가 됐다. 모자의 빨강과, 그 위로 떨어지는 진짜 빨강. 어느 게 어느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세상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검을 쥐고 있던 손이 지금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야현은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무표정이 지금 이 순간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저 광경을 보고 저런 얼굴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새삼스레 다시 알게 됐다. "승리의 대가." 야현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승리의 대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차동이 쪽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이긴 대가로 누군가가 대신 쓰러진 거라면, 그건 이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아무 답도 갖고 있지 않았다. 곽두식이 차동이를 끌어안은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빨간 모자 위로 계속 붉은 것이 스며들고 있었다. 야현의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이, 이제부터 진짜 대가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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