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시 눈을 떴을 때 왼쪽 시야는 여전히 없었다.
검은 커튼이 시야 절반을 영원히 가린 것 같았다.
대신 숨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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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다시 나타났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형!"
차동이가 내 뺨을 두드렸다.
너무 세게 두드려서 아팠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손바닥 전체로.
아프다는 게 이상하게 반가웠다.
아프다는 건 신경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형, 정신 들어요? 형!"
차동이 목소리가 갈라졌다.
빨간 모자가 내 얼굴 위로 떨어질 듯 흔들렸다.
곽두식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표정이 없다는 게 곽두식에게는 큰 감정 표현이었다.
저 남자가 표정을 지운다는 건 속으로 뭔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뜻이다.
같이 다닌 지 석 달, 그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살았네."
곽두식이 말했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이상한 거야."
"뭐가."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부활 물약도 안 먹혔던 놈이 눈을 뜨는 게."
곽두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물약 세 병 부었어. 세 병 다 안 먹혔어. 그런데 지금 이렇게 눈 뜨고 있어."
"무슨 짓 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야현이라는 이름을 꺼내야 하는지 몰랐다.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뭔가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다.
원숭이 1호가 조용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털이 거칠었다.
잡은 힘은 부드러웠다.
2호와 3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살통을 손질하며 이쪽을 힐끔거렸다.
오후 6시.
야영지로 옮겨졌다.
들것 대신 원숭이 4호와 5호가 나를 번갈아 업었다.
등에 업힐 때마다 왼쪽 눈가의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후 6시 30분.
붕대를 감았다.
차동이가 붕대를 감으면서 손을 떨었다.
"형, 아파요?"
"아니."
아팠다.
말하지 않았다.
오후 6시 45분.
곽두식이 물약 재고를 확인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세 병 중 두 병 날렸어. 남은 한 병은 아껴야 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후 7시.
곽두식이 다시 물었다.
모닥불 앞에 마주 앉은 채였다.
불빛이 그의 턱선을 따라 흔들렸다.
"뭘 봤어, 도윤."
시야 없는 왼쪽 눈 위로 붕대가 눌렸다.
붕대 안쪽이 뜨거웠다.
땀인지 피인지 알 수 없었다.
"악마를 봤어."
나는 결국 말했다.
"거래를 하자고 했어."
곽두식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한참 쳐다봤다.
원숭이 1호가 내 곁에 앉아 상처를 살폈다.
작은 손으로 붕대를 매만졌다.
매만지는 손길이 사람보다 조심스러웠다.
"거래 조건이 뭐야."
곽두식이 낮게 물었다.
"아직 몰라."
"모르는데 응했어?"
대답을 못했다.
응했다는 것도 아니고 안 했다는 것도 아니었다.
야현이 내게 답을 강요하기 전에 다시 이 세계로 돌려보냈으니까.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대답할 틈조차 없었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뜨니 여기였다.
"악마와의 거래는 함정이야."
곽두식이 말했다.
"들어본 적 있어. 처음 조건은 항상 쉬워. 그다음이 문제야."
"눈덩이처럼 커져. 처음엔 손가락 하나, 그다음엔 팔, 그다음엔 목숨."
"그래서 뭘 어쩌라고."
"안 하는 게 상책이지."
"할 거야."
곽두식이 나를 뚫어지게 봤다.
불빛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서은.
그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지구에 있는, 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지켜주지 못한 사람.
그 이름을 말하면 곽두식은 이해하지 못할 거고, 이해한다 해도 말릴 게 뻔했다.
서은의 웃는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얼굴을 붙잡고 싶었지만 손끝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사정이야."
"네 사정이 우리 목숨을 걸게 만들면 내 사정도 돼."
곽두식이 딱딱하게 말했다.
"차동이도 있어. 원숭이들도 있어. 네 목숨값에 다 딸려 들어가는 거야."
그 말에 답하기 전에 야현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어둠 속이 아니라 현실 속이었다.
야영지 한복판, 모닥불 옆에.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곽두식도, 차동이도, 원숭이들도.
오직 나만 보고 있었다.
불빛이 그녀를 통과해서 반대편 나무를 밝히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조건을 말해줄게."
야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모닥불 타는 소리와 겹쳤다.
곽두식은 그 순간 내 표정만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뭔데, 지금 뭐가 보여?"
차동이도 내 시선을 따라 허공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야현을 바라봤다.
"첫 번째 조건."
야현이 말했다.
"박대박을 이겨."
박대박.
오늘 오후, 내 눈을 앗아간 매복의 배후.
엔터테이너 직업.
노래하듯 말하는 남자.
부하 열둘을 매복시켜놓고 자기는 뒤에서 지켜본 놈.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미안한데, 이건 그냥 사업이야."
매복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이기면."
"이기면 다음 조건."
야현이 웃었다.
"지면, 서은은 영원히 못 데려와."
서은의 이름이 야현의 입에서 나온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목이 바짝 말랐다.
"어떻게 알아, 그 이름을."
"네 머릿속에 있는 걸 내가 못 볼 것 같아?"
야현이 되물었다.
"넌 죽어가면서도 그 이름만 생각했어. 그게 계약의 조건이 됐어."
"네 마지막 숨이 그 이름이었어. 그걸 내가 놓쳤을까."
"조건이 뭔지 정확히 말해."
"박대박을 이기는 것."
야현이 반복했다.
"그게 첫 번째. 나머지는 그때마다 알려줄게."
"전부 미리 말해."
"그러면 재미없잖아."
야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래는 투자야. 전부 공개하면 투자가 아니지."
"투자자가 리스크를 다 알면 그건 이미 투자가 아니라 확정된 계약서야. 재미없어."
"닥쳐."
"곧 보자."
야현은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라지는 순간 모닥불 불빛이 원래대로 나무에 닿았다.
곽두식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뭐야, 방금."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가 보였는데 그렇게 굳어."
"박대박이랑 다시 싸워야 해."
"미쳤어?"
곽두식이 소리쳤다.
목소리가 야영지 전체에 퍼졌다.
"그놈 때문에 눈을 잃었잖아. 게다가 그놈은 우리보다 세력이 세."
"그놈 부하가 열둘이야. 우리는 넷에 원숭이 다섯이 다야. 숫자를 봐, 도윤."
"알아."
"알면서 왜."
"해야 돼."
차동이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형, 저도 같이 가요."
"안 돼."
내가 곧바로 잘랐다.
"왜요."
"위험해."
"형도 위험한데 왜 형만 가요."
차동이가 빨간 모자를 고쳐 썼다.
"저도 팀이잖아요."
"형 혼자 다 짊어지는 거, 저 이제 안 봐요."
곽두식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말려도 안 들을 거잖아. 도윤이 이렇게 나오면."
그는 이마를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이번엔 정찰 먼저 하고 들어간다. 무작정 들이받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여력이 없었다.
원숭이 1호가 도끼를 다시 등에 멨다.
2호, 3호가 화살을 확인했다.
숫자를 세듯 화살촉을 하나씩 손끝으로 짚었다.
4호, 5호가 망치를 쥐고 일어섰다.
마치 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누구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오후 8시.
차동이가 화살촉에 독을 발랐다.
손끝이 검게 물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표정이 담담했다.
오후 8시 40분.
곽두식이 지도를 펼쳤다.
서쪽 폐허의 지형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했다.
"여기 무너진 성벽이 있어. 여기서 매복이 가능해."
그의 손끝이 지도 위에서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오후 9시.
박대박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원숭이 3호가 서신을 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후 9시 30분.
답장이 왔다.
[내일 정오, 서쪽 폐허에서.]
짧은 문장 밑에 노래 가사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눈 하나 준 값, 목숨으로 받아가지."
소름이 돋았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곽두식이 서신을 낚아채 다시 읽었다.
"이 새끼, 여유 넘치네."
그가 종이를 접어 불 속에 던졌다.
불꽃이 잠시 커졌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차동이는 아무 말 없이 화살통을 다시 확인했다.
원숭이들도 각자 무기를 손에 쥔 채 조용해졌다.
야영지 전체가 숨을 죽인 것 같았다.
내일 정오까지 남은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열네 시간 삼십 분.
왼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통증뿐이었다.
통증 다음엔 무엇이 올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