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칼을 쥔 첫사랑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지호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한 채 밤을 지새운 탓에 눈 밑이 퍼렇게 질려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 정도로 초췌했지만 그마저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중요한 건 오늘 그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집을 나서는 내내 나는 편지를 어떻게 썼는지,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곱씹었다. 혹시 너무 노골적이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너무 소극적이어서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던 건 아닐까. 골목을 돌 때마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학교 앞 신호등에 서서도 나는 초록불이 켜지기까지의 몇 초조차 견디기 힘들 만큼 조급했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신발주머니 사이에 낀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낯익은 필체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손끝이 떨려왔는데, 펼쳐보니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방과 후 옥상에서 기다릴게.' 서명은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지호의 글씨체라는 걸 곧바로 알아챘다. 몇 주간 그의 필체가 담긴 노트를 훔쳐보며 외워둔 획의 기울기, 마침표를 찍는 습관까지도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쪽지를 손에 쥔 채 나는 한동안 신발장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듯 벌렁거렸고, 주변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조차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게 정말 지호의 대답인 걸까. 아니면 그저 거절의 말을 준비하기 위한 자리인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그래도 나는 쪽지를 가슴 주머니에 조심스레 접어 넣었다. 마치 그것이 부서지기 쉬운 유리 조각이라도 되는 양.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 시간 내내 나는 시계 초침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고, 선생님의 목소리는 그저 웅웅거리는 배경음처럼 흘러갔다. 국어 시간에는 지문을 읽으라는 말에 두 번이나 어디를 읽는지 놓쳐 옆자리 아이가 손가락으로 짚어주기까지 했고, 수학 시간에는 칠판에 적힌 숫자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의 위치가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세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침내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나는 거의 뛰듯이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르는 동안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발끝이 계단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순간에도 나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옥상 문을 열자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철망 너머로 지호가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어깨가 조금 굳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의 손에는 내가 건넨 편지가 그대로 들려 있었는데, 구겨지지 않고 잘 접힌 상태로 있는 걸 보니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찢어버리지는 않았구나. 바람이 그의 옷깃을 흔들었고, 나는 그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옥상 바닥에 깔린 먼지와 낙엽 냄새, 멀리서 들려오는 체육 시간 아이들의 함성 소리마저도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불렀어?" 내가 묻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어색함과 곤란함이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 미묘한 낯빛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듯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이거… 읽었어." 지호가 편지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좀 놀랐는데, 그, 이렇게까지 오래 나를 봐왔다는 게…"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순간, 나는 숨을 참았다. 저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 걸까. 거절의 서두인 걸까, 아니면 그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침묵인 걸까. "이상해?" 나는 물으면서도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만약 이상하다고 대답한다면, 그 순간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가 시선을 피하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의 손가락이 편지 끝을 만지작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나도 너 신경 쓰이긴 했어. 근데 이렇게 편지를 받고 나니까, 뭔가… 진심이 느껴져서." 그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진심이 느껴진다는 말이 이렇게 사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은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옥상의 찬 바람이 뺨을 스쳤는데도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인 걸까. 이게 정말 내가 바라던 대답인 걸까. "그래서, 나랑… 사귀어볼래?" 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몇 주간, 아니 몇 달간 쌓아온 감정이 이 한마디로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응." 짧게 대답하며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순간 지호의 눈이 살짝 커졌는데, 아마 내가 너무 세게 잡았다는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 없었다. 손바닥을 통해 그의 체온이 전해지는 게 느껴졌고, 나는 그 온도를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 사이사이에 힘을 더 주었다. 이렇게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 결국 손안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손이… 좀 세게 잡는데?" 지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손을 풀지 않았다. 이 손을 놓으면 그가 다시 사라질 것 같은, 이 순간이 거짓말처럼 흩어져버릴 것 같은 불안이 목까지 차올라서였다. 그가 조금씩 손을 빼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나는 오히려 더 힘을 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냥… 놓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작게 중얼거렸고, 지호는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결국 옅게 웃으며 손을 그대로 내주었다. 그 웃음이 진심인지, 아니면 어색함을 감추기 위한 것인지 나는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그의 옆자리를 지키게 되었고, 쉬는 시간마다 그의 책상 앞에 서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가 필통을 여는 순서, 연필을 깎는 습관, 창밖을 바라보며 짓는 표정까지도 나는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지호는 처음엔 그런 나를 신기해하며 웃어넘겼지만,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이 늘어갔다는 걸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도 여기 있을 거야?" 그가 지친 목소리로 물은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그 작은 균열을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이상, 나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가방 깊숙이 넣어둔 커터칼을 다시 꺼내어 만지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제 이건 필요 없겠지. 그가 나를 받아줬으니까. 손끝에 닿는 칼날의 서늘한 감촉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필요 없다고, 이제는 정말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그럴수록 손은 더욱 그것을 놓지 못한 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손에서 놓아지지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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