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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성 서쪽 저잣거리는 밤이 되면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낮의 소란스러운 장사꾼 소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낮게 흘러다니는 술기운과 은밀한 대화들이 채웠다. 등불 몇 개가 골목 어귀를 겨우 밝혔고, 그 사이로 그림자들이 말없이 오갔다. 낮에는 활기로 넘치던 거리였으나, 밤이 되면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이서연은 그 사이를 지나 낡은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탁한 술 냄새와 기름 냄새가 동시에 밀려왔다. 남자는 구석 자리에 앉아 이미 술 한 병을 비우고 있었다. 낮에 봤던 관복은 벗고 평범한 옷차림이었는데, 그 어색한 평범함이 오히려 그가 감추고 있는 신분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앉으시오." 남자가 손짓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말투에는 이미 몇 잔 들어간 술기운이 배어 있었다. 이서연이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그녀는 주막 안을 한 번 훑었다. 손님은 셋뿐이었고, 다들 각자의 술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도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너무 조용하다.' 이서연은 생각했다. '이런 자리일수록 누군가는 귀를 세우고 있는 법이다.' "이름이 뭡니까." 그녀가 먼저 물었다. "그건 몰라도 되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백현담 학자님 밑에서 잠시 일을 배운 사람이오. 정식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분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소." "어떤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남자는 잠시 술잔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손가락이 잔의 테두리를 따라 몇 번이나 원을 그렸다. "내 여동생이 종언귀에게 당해서 감염 판정을 받았소. 감찰원 규정대로면 즉시 처형 대상이었지. 그런데 백현담 학자님이 그 판정을 뒤집어 주셨소." 이서연의 눈이 커졌다. "감염 판정을... 뒤집을 수 있습니까." "보통은 안 되오." 남자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주변을 한 번 살핀 뒤였다. "그런데 그분은 감염의 진행 단계를 판별하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소. 초기 감염은 완전히 진행되기 전까지 되돌릴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셨지. 감찰원 상층부는 그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몇 번 그런 식으로 사람을 살렸소." "그러면 지금 여동생분은..." "살아 있소." 남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짧고 단단한 대답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소. 나는 그분께 목숨을 진 사람이오. 그러니 이 자리에 나온 것이오." 이서연은 스승의 노트에 적혀 있던 문장을 떠올렸다. '감염은 확인된 것보다 훨씬 광범위할 가능성이 있다.' 그 문장 옆에는 작은 글씨로 날짜와 이름 몇 개가 적혀 있었는데, 그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이름들이 이 남자가 말하는 사람들과 겹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염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녀가 물었다. "학당에서는 귀물이 성벽 밖에서 오는 외부 위협이라고만 가르칩니다." 남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당신 스승님이 정말 그렇게만 가르쳤다면, 당신을 배려한 것이오." 그가 낮게 말했다. "감염은 외부에서만 오는 게 아니오. 이미 성 안, 어쩌면 인류 전체에 퍼져 있다는 것이 감찰원 상층부 일부의 은밀한 결론이오. 다만 그걸 공표하면 성 전체가 무너질 것이기에 숨기고 있는 것뿐이오." 이서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믿기 어려웠으나, 스승의 노트와 이 남자의 증언이 겹치는 지점이 너무 많았다. 스승은 언제나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대개 감춰진 자리에 있다.' 학당에서 가르치던 것과는 다른 결의 말이었다. 그때는 그저 학자의 습관적인 경구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문장 자체가 하나의 경고였다. "그럼 스승님이 죽은 것도, 그 은폐와 관련이..." "거기까진 나도 모르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시선이 잠시 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건 말해줄 수 있소. 백현담 학자님이 최근 조사하던 대상이 있었소. 상위 개체, 인귀 중에서도 유독 지능이 높고 인간 사회에 완전히 섞여 사는 놈이었소." "섞여 산다는 게..." "인귀는 인간의 외형과 언어, 심지어 감정까지 흉내 낼 수 있소. 개중에서도 오래 살아남은 놈들은 인간 사회 안에서 아예 신분을 위장하고 살기도 하오." 남자가 술잔을 비웠다. 빈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백현담 학자님이 쫓던 놈은, 성 북쪽 상권을 쥔 어느 상단에 섞여 있다는 소문이 있었소." "상단의 이름을 아십니까."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이서연에게는 대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만화상단(萬和商團). 그 이상은 나도 모르오. 더 알고 싶다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오." "위험이라 하면 구체적으로..." "내가 아는 건 딱 하나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술값을 탁자 위에 던져놓듯 놓았다. "백현담 학자님이 그 상단 근처를 살피고 다닌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것.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판단하시오." 남자는 더 이상의 말을 남기지 않고 주막을 빠져나갔다. 이서연은 잠시 그가 앉았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술잔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 그날 밤, 이서연은 주막을 나선 뒤 한동안 걷지 못하고 골목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인류 전체가 이미 감염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스승이 그 진실의 한 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를 죽인 것이 단순한 귀물이 아니라, 인간 사회 깊숙이 숨어든 상위 개체일 가능성. 세 가지 사실이 한꺼번에 그녀를 짓눌렀다. 어느 하나만 있었어도 감당할 수 있었을 텐데, 셋이 겹치니 숨이 막혔다. '스승님은 이 모든 걸 알고서도 저를 지키려 하셨던 걸까.'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스승이 남겼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흉내가 아니다. 원래 인간이었던 것이 변한 형태다.' 그 말의 무게가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되었다. 그때 스승은 그 말을 하면서 노트를 덮었다. 더 캐물으려 하자, 스승은 그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린 제자를 지키려는 어른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서연은 이제야 알아챘다. 골목 안은 조용했다. 멀리서 취객의 웃음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다 사라졌다. 이서연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 때문인지, 밤바람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두렵다고 물러설 것이었다면, 이 길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이서연은 골목을 벗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정해졌다. 만화상단. 그곳에서부터 원수의 윤곽을 좁혀나가야 했다. 상단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성 북쪽 상권을 장악한 곳이라면, 감찰원의 눈조차 함부로 닿지 않는 자리일 것이다. 그런 곳에 오래도록 몸을 숨기고 있었다면, 그 인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으나, 방향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거리 끝에서 등불 하나가 꺼졌다. 이서연은 그 순간 걸음을 멈췄다. 등불이 꺼진 것은 바람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등불이 꺼지기 직전, 그 아래 서 있던 그림자 하나가 분명히 움직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골목 저편, 어둠이 짙게 깔린 자리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라오고 있다.' 이서연의 손이 저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향했다. 주막 안에서 나눈 대화를 누군가 처음부터 듣고 있었다면, 이제 그녀가 살아서 이 거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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