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상복 아래 감춘 칼

3화

다음 날 아침, 이서연은 학당장을 찾아갔다. 학당장의 집무실은 이른 시각인데도 이미 서류더미로 가득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먹빛 종이 위에 얇게 깔려 있었다. "휴학을 신청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학당장은 서류를 뒤적이다 고개를 들었다. 나이 지긋한 여인이었고, 표정에는 피곤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눈 밑에 그늘이 짙었다. 밤을 새운 흔적이었다. "이유는." 학당장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후견인의 사망을 조사하려 합니다." "그건 감찰원의 소관이다." 학당장이 딱딱하게 답했다. "학생이 나설 일이 아니야." "감찰원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면, 저라도 나서야 합니다." 학당장은 붓을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 안의 시계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네가 나선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으냐." 학당장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약간의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이서연이 솔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학당장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 찍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한 달이다. 그 이상은 규정상 허가할 수 없다." 학당장이 말했다. "돌아오지 않으면 퇴학 처리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이서연이 고개를 숙였다. 집무실을 나서며 이서연은 문득 학당장의 얼굴에 스쳤던 표정을 떠올렸다. 반대나 경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해에 가까웠다. '저 사람도 한때는 누군가를 위해 규정 밖의 일을 해봤던 걸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곧 지워버렸다. 지금은 그런 것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 짐을 꾸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래도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옷가지 몇 벌, 백현담이 남긴 노트, 그리고 그가 생일마다 챙겨주었던 작은 단검 하나가 전부였다. 노트를 펼쳐보니 낡은 종이 냄새가 났다. 백현담의 필체는 언제나 정갈했다.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필체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트를 덮는 순간, 다시 현실이 돌아왔다. 그 단검을 손에 쥐었을 때, 이서연은 그가 처음 이 검을 건네주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백현담은 우산도 없이 그녀를 찾아와 이 단검을 내밀었다. "이건 사람을 해치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 백현담이 그때 말했었다. "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다. 검을 뽑는 순간에는, 이미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럼 언제 뽑아야 합니까." 그때 어린 이서연이 물었다. "뽑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백현담이 웃으며 답했다. 이서연은 그 검을 허리에 채웠다. 검집이 허리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만 넣어두었던 물건이었다. '스승님, 이번에는 제가 검을 뽑을 차례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짐을 다 꾸린 뒤, 그녀는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좁고 초라한 방이었지만,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이 방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러나 그 생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 학당 정문을 나서기 전, 조유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진짜 나가는 거야?" 조유란이 물었다. 이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예." 이서연이 답했다. 조유란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허리에 채워진 단검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건 또 뭐야." 조유란이 물었다. "스승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서연이 짧게 답했다. "신분 낮은 학생이 감찰원 일에 끼어들면 좋게 안 끝나. 그쪽 사람들, 자기네 일에 외부인 끼는 걸 싫어해." 조유란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진짜 걱정이 섞여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서연이 답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왜." 조유란이 다그쳤다. "네가 나선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이서연은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그분은 저를 거리에서 데려와 키워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넘어간다면, 저는 평생 그것을 후회할 것 같습니다." 조유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해." 그녀가 몸을 돌렸다. "죽지는 말고." 그것이 조유란이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이서연은 그 말을 의외로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조유란의 뒷모습이 학당 안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서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감찰원 본청은 성 중심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검은 돌로 지어진 외벽은 성 어디에서나 보였고, 그 자체로 위압감을 뿜었다. 성 안을 걸으며 이서연은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대부분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거나, 짐을 진 상인들이었다. 그녀처럼 학당 복장을 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몇몇 시선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머무는 시선은 없었다. 이서연은 본청 정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건물의 높이가 새삼 실감났다. 목을 뒤로 젖혀야 지붕이 보일 정도였다. 문지기 두 명이 창을 든 채 서 있었다. 갑주 위로 감찰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용건이 뭐냐." 문지기 하나가 물었다. 말투에 존중이라곤 없었다. "백현담 학자님의 사망 사건에 대해 문의하러 왔습니다." 이서연이 답했다. "학자 후견인이냐?" 문지기가 위아래로 그녀를 훑었다. "학생 신분으로 여기 올 일은 없다. 돌아가라."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합니다." 이서연이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면담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다른 문지기가 코웃음을 쳤다. "신분증명서나 감찰원 소속증이 있으면 다시 와라." 이서연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녀는 감찰원 소속이 아니었고, 백현담의 정식 가족도 아니었다. "그럼 담당 부서라도 안내해 주십시오." 그녀가 다시 물었다. 문지기가 귀찮은 표정으로 창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쿵- 소리가 정문 앞에 낮게 울렸다. "저 안에 사람이 넘쳐나는 줄 아느냐. 학자 하나 죽은 일로 여기까지 올 시간이 있으면, 학당 가서 공부나 해라." 그가 낮게 웃었다. "학자 하나라니." 이서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그분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문지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옆에 있던 다른 문지기가 픽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것 봐라, 말발은 있네. 그래서 뭐, 이름 하나 안다고 뭐가 달라지냐." 그 웃음에 이서연의 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화를 내는 순간, 저들은 나를 무시할 명분을 얻는다.' 백현담의 가르침이 다시 떠올랐다. '냉정을 잃지 마라. 냉정을 잃는 쪽이 항상 지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이서연이 짧게 답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는 정문 앞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대신 본청 건물을 따라 옆으로 돌았다. 정문이 아니라면, 다른 통로가 있을 것이었다. 백현담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정면으로 막힌 문 앞에서 물러나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았을 것이다. 건물 옆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담벼락에 붙은 벽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실종자나 수배자를 알리는 것들이었다. 백현담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산 사람을 찾는 벽보에 오르지 않는 법이었다. 건물 옆쪽에는 관리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감찰원 하급 관복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계속 문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이서연은 그에게 다가갔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실례합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백현담 학자님을 알고 계십니까." 남자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그 반응은 아까 문지기들의 무시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두려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신, 그분의 제자로군." 남자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데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소." "그럼 어디서 하면 됩니까." 이서연이 급히 물었다. 남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오늘 밤, 성 서쪽 저잣거리 끝, 낡은 주막으로 오시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성함이라도..." 이서연이 물었지만, 남자는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름은 필요 없소. 그저 그 시간에 그 자리로 오시오." 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서둘러 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은 도망치듯 빨랐다. 이서연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처음으로, 진짜 실마리 하나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저 남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서연은 그렇게 판단했다. 두려움 없이는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실마리가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해가 저물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유독 길게 느껴졌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