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강씨 가문이라는 이름은 나조차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백화점, 호텔, 그리고 최근에는 엔터테인먼트 사업까지 손을 뻗친 재벌가로, 그 집안의 딸들은 종종 뉴스나 잡지 인터뷰에 등장했다.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해도 관련 기사가 수십 페이지씩 쏟아지는 집안이었다. 그중 막내딸인 강혜린이 나를 지정해서 의뢰를 넣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저를 왜요?" 나는 박서연에게 물었다.
"프로필 사진 보고 반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미묘한 경계심도 함께 느껴졌다. "강혜린 손님, 원래 저희 쪽에서 몇 번 이용하신 적이 있는데, 취향이 확실하고 요구사항도 뚜렷한 분이에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조심이요?"
"네. 재벌가 자제들이 이 서비스 이용할 때는 대체로... 좀 즉흥적이거든요." 그녀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멈추었다. "돈 걱정이 없으니까, 원하는 걸 바로 요구하는 편이에요. 도윤 씨 지금까지 만난 손님들이랑은 좀 다를 거예요.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네."
"강혜린 손님은 사람을 시험하는 걸 좋아해요.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계약 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긴장 놓지 마세요."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그 경고를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유진은 조심스럽고 서투른 편이었고, 한지원은 차분하고 절제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혜린은 그 두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일 것 같았다.
시험이라니. 무슨 시험을 말하는 거지?
박서연은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준비된 슈트를 건네줄 뿐이었다.
약속은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잡혔다. 나는 그날 박서연이 특별히 준비해준 슈트를 입고 나갔는데, 평소보다 더 비싼 옷을 걸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넥타이를 세 번이나 다시 매고 나서야 겨우 만족스러운 매듭이 나왔다. 라운지 입구에서 신원을 확인받고 들어가자, 넓은 룸 안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강혜린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화려한 인상이었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 손목에 걸린 시계는 한눈에 봐도 값을 짐작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룸 안의 조명은 은은하게 낮춰져 있었고, 그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시계 알이 유독 반짝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웃음을 지었다.
"어?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낫네." 그녀가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김도윤입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했다.
"강혜린. 그냥 혜린이라고 불러도 돼요. 우리 나이 비슷하잖아요." 그녀는 손짓 자기 옆자리를 두드리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 손짓을 따라 그녀의 옆에 앉았고, 그 순간 그녀에게서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익숙하지 않은 향이었지만 확실히 비싼 향이었다. 꽃과 나무가 섞인 듯한, 도무지 이름을 짐작할 수 없는 향이었다.
"와인 마셔봤어요?" 그녀가 물었다.
"조금요. 근데 잘 몰라요."
"오늘 내가 가르쳐줄게요." 그녀가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주문했다. 웨이터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다음 병을 준비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 라운지에서 그녀가 얼마나 익숙한 손님인지 짐작이 갔다. "나 이런 거 진짜 좋아해요. 음악, 예술, 와인. 근데 주변 사람들은 다 지루해해서 같이 얘기할 사람이 없어요."
"주변에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많죠. 근데 다 나한테 뭘 바라는 사람들이에요." 그녀가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 "가족 사업 얘기, 인맥 얘기, 아니면 그냥 내 배경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 진짜로 그림 얘기, 음악 얘기 하고 싶어서 나 만나는 사람은 없어요."
그녀의 말투는 가볍고 발랐지만, 그 말 속에는 어딘가 외로움이 섞여 있는 듯했다. 재벌가의 막내딸이라는 화려한 껍데기 안에, 정작 진심으로 대화할 사람을 찾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진의 서투름과도, 한지원의 절제와도 다른 종류의 결핍이었다.
대화는 예상보다 활기차게 이어졌다. 강혜린은 최근 다녀온 유럽 여행 이야기, 좋아하는 작가와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종종 맞장구를 쳤다. 사실 절반은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지만, 그녀가 신나서 말하는 걸 보니 굳이 아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종종 시험하는 듯한 질문들이 섞여 있었다.
"이 화가 알아요?" 낯선 이름을 던지고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모르는 게 당연해요. 아는 척했으면 재수 없었을 텐데."
그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는 척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도윤 씨, 이 일 왜 하는 거예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돈이 필요해서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하네."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돈 많이 벌면 그만둘 거예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만둘 거냐고. 사실 나는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그 답을 정해두지 않았다. 돈이 필요해서 시작했지만, 이유진과 한지원을 만나면서 느낀 감정들이 단순히 돈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시작했고, 돈 때문에 계속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모르겠어요." 나는 결국 그렇게 답했다.
강혜린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와인잔을 들어 살짝 부딪히며 말했다.
"재밌겠네, 도윤 씨는."
"뭐가요?"
"모르겠다는 대답. 보통 사람들은 나한테 뭐라도 확실한 대답을 하려고 애써요. 목표가 있는 것처럼, 계획이 있는 것처럼. 근데 도윤 씨는 그냥 모른다고 하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고, 나는 그 눈빛 속에서 처음으로 그녀가 나를 흥미로운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시험을 통과했다는 뜻인지, 새로운 시험이 시작됐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즈음, 룸 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강혜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녀가 짧게 "들어와"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며 라운지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그녀에게 무언가를 귀속말로 전했다.
매니저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몸을 낮추고 조심스레 말을 고르는 모양새만으로도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강혜린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매니저에게 짧게 뭐라고 답한 뒤, 매니저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말없이 와인잔만 내려다보았다.
"뭔데 그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손님이 지금 밖에서 도윤 씨를 찾고 있대요. 이름은 말 안 하고, 그냥 코드네임만 남겼다는데."
"코드네임이요?"
내 이름을 아는 사람, 그것도 코드네임으로 나를 찾을 만큼 이 업계와 가까운 사람. 머릿속으로 아는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려 했지만,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
이유진은 아닐 것이다. 한지원도 아닐 것이다.
그럼 누구지?
"적포." 강혜린이 그 단어를 뱉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식는 것을 느꼈다.
적포.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결코 유쾌하지 않은 맥락으로 스쳐 지나갔던 이름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냉기가 손끝까지 번졌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와인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강혜린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흥미가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도윤 씨." 그녀가 조용히 불렀다. "그 이름, 아는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