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나, 렌탈남친이 되었다?!

3화

그날 저녁, 레스토랑을 나서며 이유진은 명함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은행 마크가 새겨진 심플한 종이 위에 그녀의 개인 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매니저를 통하지 않고 직접 연락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종이의 질감이 유독 매끈했다. 명함 한 장에도 급이 있다는 걸 처음 실감했다. 나는 그 명함을 받으며 이게 규정에 맞는 건지 잠깐 고민했다. 박서연이 여러 번 강조했던 말이 떠올랐다. 개인 연락처는 웬만하면 주고받지 말라고, 그게 서로를 지키는 선이라고. 하지만 이미 손안에 들어온 명함을 다시 돌려주는 것도 어색한 그림이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지갑 안에 넣었다. 나중에 서연에게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그녀가 헤어지는 인사로 남긴 말이었다. 겨울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고, 그녀는 그걸 손으로 넘기며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편했어요, 도윤 씨랑." "저도요."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실제로 그랬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렀고, 세 시간이라는 약속된 시간이 끝나갈 무렵에는 오히려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그녀가 택시에 오르기 전, 나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입을 열지 않고 문을 닫았다. 택시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삼켰던 말이 뭐였을지, 괜한 상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오늘 받은 페이를 계산해보았다. 세 시간에 이십만 원. 편의점 알바 삼일 치를 세 시간 만에 벌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가는 불빛들을 보면서, 나는 그 돈이 정확히 뭘 대신하는 건지 생각해보았다. 시간? 웃음? 아니면 그저 옆자리를 지켜주는 존재감 같은 것? 하지만 그 실감보다 더 크게 남는 건,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편안하게 느꼈다는 그 짧은 순간의 감각이었다. 손끝에 남은 온기 같은 게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첫 의뢰가 그렇게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박서연은 전화기 너머에서 환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진짜요? 재계약 얘기까지 나왔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도윤 씨, 이 정도면 완전 신인상감이에요." "신인상이요?"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게 있어요, 저희 쪽 내부 랭킹." 그녀가 킥킥거렸다. "매니저들끼리 매달 순위 매겨요. 도윤 씨 오늘 순위권 진입이에요, 아마." "그런 걸 왜 매기는 거예요?" "동기부여죠, 동기부여. 아무튼 다음 의뢰도 벌써 들어왔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긴장했다. 첫 의뢰가 무사히 지나갔다고 해서 두 번째가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이번엔 어떤 분이세요?" "이번엔 좀 다른 분위기예요. 서울대 한국사학과 강사님이신데, 나이가 좀 있으세요." 박서연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삼십대 후반. 이혼 경력도 있으시고요." 나는 그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물었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문제없을까요?" "손님이 원하시는 게 그거예요. 어린 남자친구 느낌."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예의 지키고 대화 잘 들어드리면 돼요." "어린 남자친구 느낌이라." 나는 그 말을 몇 번 되짚어보았다. 대체 그게 구체적으로 뭘 뜻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손을 잡아준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저 어리광을 받아주면 되는 걸까. 그 말이 어쩐지 첫 의뢰 때와는 다른 종류의 부담으로 느껴졌다. 서울대학교 강사라는 직함부터가 나를 조금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데, 그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을 상대로 애인 역할을 한다는 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캠퍼스 어딘가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뒷목이 살짝 저릿했다. "저희 학교에서 강의하시는 분이면, 혹시 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아요?" "사학과면 도윤 씨 전공하고는 멀잖아요." 박서연이 가볍게 넘겼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런 경우 대부분 잘 모르는 얼굴로 시작해요." "성함은요?" "한지원 교수님이세요." 박서연이 대답했다. "참, 사학과에서는 꽤 유명하신 분이에요. 논문도 많이 쓰시고, 방송에도 몇 번 나오셨어요." "방송에요?" "교양 프로그램 같은 데, 역사 다큐멘터리 자문 같은 거요. 얼굴이 알려진 편이라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얼굴이 알려진 편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굴이 알려진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건, 나 역시 어딘가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었다. 첫 의뢰 때는 상대가 은행원이라 얼굴이 알려질 일이 없었는데, 이번은 조금 다른 종류의 문제였다. 나는 그 이름을 검색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억지로 참았다.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만나는 것보다는, 조금은 백지 상태로 만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 어색하게 아는 척을 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말해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이 나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이유진과의 저녁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가 마지막에 남긴 말, 진짜 커플처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여전히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말 속에는 단순한 데이트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타협점. 나는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어디까지를 감당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돈은 필요했다.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손을 잡는 것까지는 괜찮을까. 어깨에 기대는 것까지는. 그 이상은 어떨까. 나는 아직 이 경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확신이 없었고, 그 불확실함이 매번 새로운 의뢰 앞에서 나를 흔들었다. 방 안의 형광등 불빛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강의를 듣는 내내 나는 옆자리에 앉은 동기가 하는 이야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야구부 주장인 윤아라가 이번 주말 동아리 회식을 하자고 떠들었지만, 내 머릿속은 한지원이라는 낯선 이름과 그녀와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윤아, 듣고 있어?" 윤아라가 내 팔을 툭 쳤다. "어, 어. 회식. 갈게." 나는 대충 대답했다. "너 요즘 뭐 있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훑어보았다. "표정이 좀 이상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윤아라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다행히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한지원. 삼십대 후반, 이혼 경력, 사학과 강사. 그 세 가지 정보만으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사학과 강사라는 말에서 오는 이미지와 이혼 경력이라는 말에서 오는 이미지가 자꾸 어긋나며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엄격하고 딱딱한 사람일까, 아니면 방송 경험이 있다니 사람 앞에서 능숙하게 웃는 법을 아는 사람일까. 나는 강의가 끝난 후 도서관으로 향하며, 만남까지 남은 이틀을 어떻게 준비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사 관련 기본 상식이라도 훑어봐야 하나, 아니면 그런 건 오히려 부담스러워할까. 나이 차이가 있는 상대와 대화를 이어가려면 어떤 화제가 안전할지, 하나씩 따져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날 오후, 나는 예상치 못한 문자 한 통을 받고서야 준비 시간이 이틀이 아니라 하루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이 앞당겨졌다는 박서연의 문자였고, 나는 그 문자를 읽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액정 위에 뜬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하루. 겨우 하루 만에, 얼굴도 모르는 서울대 강사 앞에서 어린 남자친구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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