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번 달까지 준비 안 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서재 문틈으로 이강철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원래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목소리 톤이 심상치 않았다.
"그 병원, 내가 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거 알지."
"···알고 있어요."
강선희의 목소리가 낮고 힘없이 이어졌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아버지 수술비,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시간은 넉넉히 줬잖아."
이강철의 말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마치 유리를 긁는 소리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그냥 지금처럼 있으면 돼."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살갗이 아릴 정도로 힘을 준 채였다.
〈그냥 지금처럼 있으면 돼.〉
그 말이 협박이라는 걸, 서재 안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은 그 협박을 무기로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싶은 충동과 그냥 돌아서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문고리를 잡을까, 그냥 이대로 계단을 내려갈까.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틈으로 발소리가 다가오는 게 들렸다.
나는 재빨리 계단 뒤로 몸을 숨겼다.
등을 벽에 바짝 붙이고, 숨을 죽였다.
서재 문이 열리고 강선희가 걸어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달랐다.
발끝을 질질 끄는 것처럼, 힘없이 이어지는 걸음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 채 부엌 쪽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벽에 기댄 등이 서늘했다.
내가 방금 들은 게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짚었다.
수술비, 협박, 지금처럼 있으면 된다는 말.
그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자꾸만 하나로 엮였다.
이강철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다른 얼굴이었다.
-
다음 날 저녁, 나는 우연히 부엌 앞을 지나다 강선희가 혼자 서 있는 걸 보았다.
식탁 위에 놓인 서류 몇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출 관련 서류처럼 보였다.
작은 글씨들이 빼곡한 종이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저기, 강선희 씨."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서류를 덮으려는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어머, 준서 학생, 왜 그러세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는 게 느껴졌다.
"혹시··· 힘든 일 있으면 저한테 말해요."
말이 튀어나온 순간, 스스로도 놀랐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제 들은 말이, 그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강선희가 서류를 황급히 접어 옆으로 치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별일 아니에요."
"···제가 언제요···?"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눈가에는 그늘이 짙게 남아 있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오히려 더 아파 보였다.
"학생이 신경 쓸 일 아니에요."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가 뒤로 살짝 몸을 뺐다.
식탁 모서리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좁혀진 거리 사이로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가늘고 얕은 호흡이었다.
심장이 목까지 차올랐다.
부엌 안 공기가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웅웅거렸다.
"강선희 씨."
나는 낮게 그녀를 불렀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순한 눈매 안에 감춰진 지친 기색이,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무언가로 흔들리고 있었다.
두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준서 학생···."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의 손끝이 앞치마 자락을 꽉 쥐었다.
손등에 힘줄이 살짝 도드라졌다.
나는 그 손을 보며 무언가 확신했다.
〈이 여자도 흔들리고 있다.〉
그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퍼져나갔다.
열기가 목덜미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그 열기를 눌렀다.
아버지가 이 여자를 협박으로 붙들어두고 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 답을 찾기도 전에,
현관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엄마, 나 왔어!"
다은의 목소리였다.
강선희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떼며 서류를 챙겼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류 뭉치를 가슴에 안았다.
"저는 이만···."
그녀가 서둘러 부엌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심장 박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손바닥에는 그녀의 앞치마 자락을 잡았던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실제로 만진 것도 아닌데, 그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가락 끝이 저릿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 여자를 원한다.〉
처음으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자각이었다.
그리고 그 자각과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더 짙어졌다.
연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낯설고 불편한 단어였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같은 지붕 아래, 같은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서 있는 셈이었다.
그 사실이 스스로도 우스울 정도로 기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습다고 해서 이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
다은이 부엌으로 들어와 나를 발견했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식탁 위에 던져놓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빠, 여기서 뭐 해?"
"그냥 물 마시러."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컵을 들어 물을 마시는 척, 시선을 피했다.
다은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눈치 하나는 빠른 아이였다.
"표정이 왜 그래?"
"어떤데."
"뭔가··· 이상해."
다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비췄다.
"아, 맞다. 엄마가 문자 보냈는데."
"누구 엄마."
"우리 엄마 말고, 박정혜 여사님."
다은이 화면을 보여줬다.
짧은 문자였다.
〈다은아, 엄마 원래 다음 주에 온다고 했는데 일정 바뀌어서 오늘 저녁에 도착해. 다들 저녁 같이 먹자.〉
나는 그 문자를 읽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부엌을 채웠던 열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박정혜가 오늘 저녁, 이 집에 들어온다.
그것도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앞당겨서.
강선희가 이 집에서 감당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방금 전 내가 그녀에게 느낀 감정.
그 모든 게 오늘 저녁, 한 식탁 위에서 부딪히게 될 참이었다.
나는 다은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글자 하나하나가 유독 또렷하게 눈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