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쿵.
한소율의 등이 책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서재 안을 갈랐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조은채의 손이 한소율의 목을 움켜쥔 채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책장 위의 낡은 양장본들이 흔들리며 몇 권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종이 냄새와 먼지가 훅 끼쳐 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내 눈에는 오직 한소율의 얼굴만 들어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 발끝이 바닥에서 살짝 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 같아서,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손목을 향해 팔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놔요, 이 사람!"
내 목소리가 서재 안에서 이상하리만치 크게 울렸다. 천장이 높은 방이라 그런지 그 소리가 벽을 타고 몇 번이나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조은채의 눈이 나를 향해 돌아가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사이로 몸을 밀어넣고 있었다.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의 몸으로 뱀파이어의 팔뚝을 붙잡는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행동인지, 나는 이미 이 성에 온 지 나흘 만에 뼈저리게 배운 참이었다. 첫날 밤 복도에서 마주쳤던 하인 중 하나가 한순간에 벽에 처박히는 걸 봤을 때, 나는 그 힘이 인간의 상상 범위를 아득히 벗어난다는 걸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손이 먼저 나갔다. 조은채의 팔은 마치 대리석 기둥을 붙잡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단단함에 밀려 옆으로 튕겨 나가며 바닥에 어깨를 찧었다.
그 순간이었다. 등이 바닥에 닿는 충격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고, 나는 갑자기 여의도의 그 횡단보도 위에 서 있었다.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두 눈을 찔러 오고, 김도현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고, 클랙슨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리던 그 순간.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감각, 아스팔트가 얼굴을 향해 다가오던 그 마지막 장면이 눈꺼풀 뒤에서 재생되었다. 심장이 갑자기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온 것처럼 쿵쿵 뛰었고, 손끝부터 팔뚝까지 저릿한 감각이 번져 나갔다. 죽는다. 나는 다시 죽는다.
"강민준."
낮고 건조한 음성이 그 환영을 단칼에 베어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서재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눈앞에는 선우해나가 서 있었다. 언제 그 자리에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저 소파 위에서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내 바로 앞에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실크 셔츠 자락이 흔들리는 걸 보고서야 방금 전까지 그녀가 저만치 떨어진 소파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조은채의 손이 스르르 풀리며 한소율의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목에서 컥, 하는 마른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겨우 팔을 짚고 일어나려 했는데, 그 순간 선우해나의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억,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강한 힘이었다. 손목뼈가 그대로 으스러질 것 같은 압력에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붉은 기운이 도는 눈동자가 내 손목께를 향해 있었는데,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조은채와 부딪히며 손등이 책장 모서리에 긁혀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는 걸.
붉은 실선처럼 얇게 그어진 상처였다. 겨우 그 정도의 상처가, 이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해나 님?"
한소율이 목을 문지르며 힘겹게 부른 이름에도 선우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아귀가 점점 더 세게 조여왔고, 나는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콧날이 아주 미세하게 벌어지는 게 보였다. 마치 짐승이 사냥감의 냄새를 확인하듯, 그 붉은 눈동자가 짙어지고 동공이 좁아지는 걸 나는 코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그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도 묵직한 머스크 향이 갑자기 몇 배는 짙어진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향이 목구멍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죽을 것 같아.
등줄기로 소름이 좍 끼쳐 올랐다. 이 사람이, 나를 구했다던 이 사람이, 지금 나를 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데, 선우해나의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지며 송곳니 끝이 드러났다. 하얗고 날카로운 그 끝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는 걸 보는 순간,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대로 목이 뜯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하얗게 지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온몸이 얼어붙었다.
몇 초였을까. 나에게는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해나 님, 손등입니다."
한소율이 목이 잠긴 소리로 겨우 뱉은 그 한 마디에, 선우해나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더니 손아귀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몇 초간 나를 내려다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방금 전까지 그녀의 눈에서 번뜩였던 붉은 기운이 정말로 존재했던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나가."
그녀가 조은채와 백서영을 향해 짧게 내뱉은 그 한마디에는 방금 전까지의 그 위태로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으며,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조은채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나를 스쳤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짜증인지 흥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백서영은 목걸이의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흘낏 보고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또각또각 울리며 서재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폐 속 깊숙이 공기가 들어차는 감각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우해나는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야구 중계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살짝 높였다. 화면 속 캐스터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그 광경이, 방금 전까지 벌어졌던 일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나는 순간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손등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가 이 방 안에서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한소율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목에는 벌써 시퍼런 자국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손가락 다섯 개의 모양이 그대로 찍힌 것처럼 선명했다. 그녀는 그 상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신 내 손등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피가 나면 안 됩니다."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말 속에서 처음으로 그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걱정이 아니라 경고에 가까웠다. 그녀는 내 손등을 소매로 눌러 지혈하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당신 냄새가, 그들 모두에게 이상하게 감지된다는 거, 잊지 마세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손등을 누르는 그녀의 손길이 뜻밖에도 조심스러웠고,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금 전 선우해나의 붉은 눈동자가 내 상처를 향해 짙어지던 그 순간이,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소율 씨, 방금 그건……"
내가 겨우 입을 떼자 한소율은 고개를 저었다. 짧고 단호한 몸짓이었다.
"여기서는, 묻지 않는 게 나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소파 쪽을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기도 전에,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손등의 상처는 여전히 욱신거렸고, 소매 위로 배어난 피의 온기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 저편에서는 여전히 야구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무심한 목소리 사이로, 나는 선우해나의 등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는 걸 보았다. 마치 아직도 무언가를 참고 있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