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등은 거절하겠습니다

2화

그날 밤 나는 방에 틀어박힌 채 노트 한 권을 펼쳐놓고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 글씨가 삐뚤빼뚤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는데,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장면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을 되감듯 하나씩 선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랑영웅학교 입시 결과 발표 장면, 순위표 상단에 이름을 올리는 주인공들,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 아무 설명도 없이 지나가듯 언급되던 이름 하나. 한도현. 종합 순위 2위. 나는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손끝이 저릿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2위라는 숫자가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나쁜 성적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소설 속에서 나는, 그러니까 그 조연 한도현은 입시 이후 단 세 번 더 언급되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주인공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 인물로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한 발 물러나 있었다. '한도현은 경화 능력의 한계로 인해 실전 배치에서 후방 지원을 맡게 되었다.' 그 문장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노트 위에 펜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째서 하필 나야. 방 안은 조용했고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째깍, 째깍. 그 소리가 마치 남은 시간을 세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지금까지의 인생을, 아니 두 번째 인생을 되짚어보았다.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자라, 열세 살에 경화 능력을 각성하고, 남들처럼 화랑영웅학교 입시를 준비해온 열다섯 살의 나. 그 모든 게 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억 속 다른 장면들도 하나둘 떠올랐다. 주인공이 강적을 상대하며 위기에 처했을 때, 후방에서 지원 신호만 보내다가 조용히 퇴장하던 장면. 졸업식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않고 스쳐 지나가듯 배경에 서 있던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도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이 그대로 잊혀지던 그 이름. 그게 바로 나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그 서늘함을 밀어냈다. 정해져 있었다고? 나는 고개를 들어 노트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소설 속 서사는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였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심장의 두근거림도, 손끝의 떨림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억울함도 그 이야기 속에는 없던 감정이었다. 원작의 한도현은 아마 이런 걸 몰랐을 거다. 자신이 조연이라는 사실도, 2위에서 멈추게 될 운명도,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무의미할 정도로 조용한 삶도. 그럴리가. 이제는 다르다. 나는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닿은 손바닥이 서늘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는 시각이었고, 나는 그 풍경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 불빛들 중 몇 개가 꺼지고 나면 새벽이 올 것이고, 새벽이 지나면 다시 학교에 가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 결국 아홉 달 뒤엔 입시장에 서 있게 될 것이었다. 원작 속 지식이라는 게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이상, 나는 이걸 그냥 흘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경화 능력. 원작 속에서는 단순 방어형으로 분류되어 초반에 반짝하다 잊혀지는 능력이었지만, 나는 그 평가가 틀렸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원작 속 누구도 그 능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소 부위만 경화시켜 타격의 정밀도를 높이는 방식이라든가, 경화 유지 시간을 늘려 지구력을 확보하는 방식이라든가, 그런 응용은 소설 속 어디에도 서술된 적이 없었다.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치고 이번엔 다른 페이지에 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왼쪽엔 지금까지 알고 있는 원작 속 입시 세부 항목들을, 오른쪽엔 내가 보완해야 할 부분들을 적어 내려갔다. 체력 시험, 실전 대련, 능력 심층 평가. 그 세 가지 축 중에서 내가 원작 속 한도현보다 확실히 앞설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하나씩 짚어보는데,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남은 시간은 아홉 달. 화랑영웅학교 입시까지 정확히 아홉 달이 남아 있었다. 아홉 달이라는 숫자를 입 밖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원작 속 한도현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다. 아마도 평범하게, 남들만큼만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2위였다. 나라면 다를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노트 맨 앞장에 큼지막하게 목표를 적고 있었다. 종합 순위 1위. 그 문장을 적어놓고 한참을 바라보는데,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허, 웃음이 새어 나오는 스스로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하필 1위를 노리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저 2위라는 정해진 결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답할 것 같았다. 원작 속 조연으로 살다가 조용히 잊혀지는 삶이라니, 그런 미래를 알면서도 그대로 걸어가는 건 나답지 않았다. 창밖 어둠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손끝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 만큼 결연해 보였다. 아홉 달 후의 나는 지금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그리고 그 변화가 정말 나를 원작의 궤도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도해볼 것이다. 원작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다 놓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앎을 발판 삼아 다른 곳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벽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소리를 냈다. 땡, 땡, 하고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휘청였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부터,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채 식기도 전에,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원작 속에서 한도현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비단 능력의 한계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시 명단 어딘가에 적혀 있던,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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