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세계의 주먹은 무겁다

5화

숫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4. 8, 0. 480kg. 한서린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보고 있었다. 등이 굳으면 어깨가 먼저 안다. 어깨가 아래로 처지지 않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528kg. 그건 처음 응시했을 때 나온 그녀의 기준치였다. 석 달 전, 예비 심사장에서 나온 숫자. 그때 나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숫자가 뜨는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던 걸 기억한다. 지금 나온 숫자는 그보다 낮았다. 기준선인 500kg에도 못 미치는 숫자. 48kg 차이. 그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나는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저 격차가 그녀의 표정을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 알았다. 관중석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떨어졌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준선 아래잖아." 또 다른 목소리.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박정호가 서판을 확인했다. 손끝으로 종이를 짚어가며 숫자를 하나씩 대조했다. "기록과 다르군." 그의 목소리엔 억양이 없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목소리, 딱 그만큼이었다. "장치가 잘못됐습니다." 한서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평소의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낮고, 짧고,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문장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장치는 방금 확인했소." 박정호의 대답은 냉정했다. 그가 원판 옆의 계측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계측기의 붉은 램프가 정상 작동을 뜻하는 초록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서린이 원판을 다시 봤다.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가렸다. 붉은 해가 원판 정면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 빛이 원판 표면에서 튕겨 나와 그녀의 눈을 정확히 찔렀다. 오전 9시 47분. 해는 아직 낮았다. 경기장은 동쪽을 향해 세워져 있었고, 이 시간대는 원판이 태양을 정면으로 받는 유일한 구간이었다. 운영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순번을 이렇게 짜놨다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방치였다. "눈이 부셔서 타점을 놓쳤습니다." "그건 응시자의 책임이오." 박정호가 서판에 뭔가를 적었다. 펜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재시험 기회를 요청합니다." "이미 오늘 정해진 순번은 끝났소. 재시험은 다음 순환까지 대기해야 하오." "다음 순환이면." "세 계절 후." 그 말에 한서린의 표정이 흔들렸다. 세 계절. 아홉 달. 그 시간이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떨리는 걸 봤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걸 봤다. 입술을 깨무는 걸 봤다. 나는 그녀가 이 시험을 위해 준비한 시간을 알고 있었다. 매일 새벽 5시, 그녀는 원판과 똑같은 크기의 표적을 세워두고 주먹을 뻗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손등이 갈라지는 겨울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 시간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세 계절이라는 말이 그녀에게 어떤 무게인지,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어도 몸으로는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규정은 규정이오." "저는—" 한서린의 말이 끊겼다. 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문장들이 목 안에서 서로 부딪히는 것 같았다. 박정호는 그녀를 잠깐 쳐다봤다. 그 시선이 길지 않았다. 2초, 3초쯤 될까. 그러다 서판을 다시 내려다봤다. 경기장 안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모두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의 특례를 인정하겠소." 그가 말했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단, 지금 이 자리에서, 즉시." 한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시간에 눈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시오." 박정호의 말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안에 어떤 배려가 숨어 있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가 냉정한 건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규정 안에 가둬두는 방식으로만 표현하는 사람이라서일지도 몰랐다. 규정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면서, 규정 안에서 최대한을 내어주는 방식.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한서린이 다시 원판 앞에 섰다. 붉은 해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여전히 낮고, 여전히 정면에서, 여전히 원판에 반사되고 있었다. 9시 51분.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고, 그늘이 원판을 덮으려면 더 멀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하면 팔의 각도가 무너졌다. 무너진 각도로는 제대로 된 타격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걸 알았다. 산타를 배울 때 배운 첫 번째 원칙. 눈이 목표를 보지 못하면 주먹은 목표에 닿지 못한다. 사부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치는 주먹은, 이미 반쪽짜리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었다. 지금은 웃을 수가 없었다. 한서린이 팔을 뒤로 당겼다. 손이 떨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는 반쪽만 보이는 시야로 원판을 조준했다. 왼쪽 눈만 뜨고, 오른쪽 눈은 완전히 감은 상태. 그 상태로는 거리 감각이 어긋난다. 원판이 실제보다 가깝게 보이거나, 멀게 보인다. 어느 쪽이든 정확한 타점은 나올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실렸다. 숨을 참았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박정호는 서판을 든 채 그녀를 지켜봤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서판을 쥔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주먹이 나가기 직전, 나는 배낭을 열고 있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등산 재킷 안주머니, 그 안쪽 지퍼 칸. 손끝에 딱딱한 케이스가 닿았다. 그 케이스를 마지막으로 만졌던 게 언제였는지, 순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냥 지금 그걸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지퍼를 당기는 손끝이 떨렸다. 케이스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긁었다. 아팠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한서린의 주먹이 원판을 향해 뻗어 나가는 순간,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잠깐." 내 목소리가 경기장 안에 울렸다. 한서린의 주먹이 원판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공기를 가르던 그 주먹이,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잃고 허공에서 굳었다.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담긴 건 놀람이었을까, 원망이었을까. 구분할 수 없었다. 관중석 전체가 나를 봤다. 박정호도 나를 봤다. 그의 시선이 내 손, 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케이스로 향했다. 손에 든 케이스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몰랐다. 나조차도 이걸 지금 꺼내는 게 맞는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경기장 안의 모든 시선이 내 손끝에 고정된 채,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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