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세계의 주먹은 무겁다

1화

통장 잔고 0원. 카드값 320만 원 연체. 등산 장비점 임대료 두 달 밀림.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도현. 서른을 코앞에 둔 등산 장비점 사장이었다. 아니, 사장이었던 사람이었다. 가게 문에는 이미 압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빨간 글씨가 유리창을 가로질렀다. [영업 정지] 그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3년 전, 이 가게를 열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간판을 달던 날, 아버지가 옆에서 사다리를 붙잡아줬다. "이걸로 먹고살 수 있겠냐." 아버지는 그렇게 물었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산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알 것 같다. 등산 인구는 줄었고, 대형 프랜차이즈가 골목까지 들어왔고, 나는 매달 마이너스를 채워 넣다가 결국 바닥까지 왔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수염은 며칠째 정리되지 않았고, 눈 밑은 시커멨다. 그 얼굴 위로 빨간 스티커 글씨가 겹쳐 보였다. [영업 정지]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나를 향한 판결문 같았다. 문을 열었다. 전기는 이미 끊긴 상태였다. 어두운 매장 안, 텅 빈 선반들이 나를 맞았다. 한때 색색의 재킷과 등산화가 빽빽하게 걸려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먼지만 쌓여 있었다. 오후 3시 12분.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방수 재킷, 등산화, 하켄, 로프. 팔리지 않은 것들이 배낭 하나에 다 들어갔다. 초콜릿 두 개와 선글라스도 그 안에 있었다. 왜 챙겼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손에 잡히니까 넣었다. 배낭을 메면서 손가락이 로프의 감촉을 오래 만졌다. 이 로프로 첫 손님을 안내했었다. 초보자용 8mm 로프, 5만 원짜리였는데 그날 매출이 딱 그거였다. 그날은 웃으며 문을 닫았다. 오늘은 웃을 이유가 없었다. 가게 안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카운터 위에 놓인 낡은 계산기. 액정에 떠 있는 숫자는 0. 정확히 내 통장과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등산장비 도매 - 최 대리]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세 번, 다시 울렸다.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사장님, 미수금 320 처리 안 해주시면 법적 조치 들어갑니다.] 읽고 나서 화면을 꺼버렸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타이밍이 참, 얄궂었다. "밥은 먹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로 도마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아들 걱정을 하면서도 손은 부엌일을 멈추지 않았다. "도현아,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 일 없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눈치챘는데 모르는 척했을 수도 있다. "요즘 가게는 잘돼?" "어, 잘돼." 거짓말이 입에서 너무 쉽게 나왔다. "밥 거르지 말고. 엄마가 반찬 좀 보낼까?" "괜찮아. 나중에 갈게." "그래, 몸 챙겨."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한참 동안 꺼진 화면을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얼굴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는 산으로 향했다. 왜 산이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거기밖에 갈 곳이 없었다. 버스를 타는 대신 걸었다. 걷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산타 몇 가지 동작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의미 없는 반복이었다. 그때는 산악부 선배가 나에게 로프 매는 법을 가르쳐줬다. "손끝에 힘 빼. 힘주면 오히려 안 돼." 그 말이 지금은 이상하게 다르게 들렸다. 힘을 빼면 안 되는 순간에 나는 힘을 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산을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관리소 직원도 이미 퇴근했는지 초소는 비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숲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습기와 흙, 그리고 조금 썩은 나무 냄새. 익숙한 냄새였는데도 오늘은 낯설게 느껴졌다. 오후 6시 47분. 능선에 올랐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발밑은 절벽이었다. 아래는 까마득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떨림이 두려움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등산화 밑창이 돌 위에서 미끄러졌다. 나는 균형을 잡으려 팔을 벌렸다. 배낭 속 초콜릿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왜 하필 그 소리가 지금 신경 쓰이는지 몰랐다. 멀리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저 아래 어딘가에 내 가게가, 내 인생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작은 점들의 집합처럼 보였다. 저 점들 중 하나가 내 것이었는데, 이제는 구분도 되지 않았다. 한 발 더 다가갔다. 돌 하나가 발끝에서 떨어졌다. 돌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숨을 삼켰다. 이대로 끝내면 편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뭔가 거대한 감정이 몰려온다고들 했다. 후회, 미련, 두려움, 그런 것들. 그런데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숫자만 떠올랐다. 0원. 320만 원. 두 달치 임대료. 숫자가 감정의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더 세게 불었다. 몸이 휘청였다. 나는 그 순간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른손이 뜨거워졌다. 손등에서 금빛이 번졌다. 피부 아래로 뭔가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위로 얇은 금속 마디가 돋아나고 있었다. 관절마다 작은 빛이 깜박였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뭐야, 이게." 목소리가 떨렸다. 손을 흔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팔뚝까지 금빛 선이 뻗어 나갔다. 등산화 밑이 흔들렸다. 중심을 잃었다. 빛은 뜨거우면서도 차가웠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움직였다. 나는 그 손을 붙잡으려는 듯 반대쪽 손으로 감쌌다. 소용없었다. 빛은 이미 팔꿈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발밑에서 돌이 또 하나 떨어졌다. 이번엔 내 발이 함께 미끄러졌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절벽 위가 아니었다. 딱딱한 돌바닥이었다. 하늘은 두 개의 해가 떠 있었다. 하나는 붉고 하나는 희었다. 숨이 턱 막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부터 달랐다. 흙냄새도 아니고, 돌냄새도 아니었다. 금속이 타는 듯한, 알 수 없는 향이 코를 찔렀다. 바람의 온도도 이상했다. 분명히 밤이어야 할 시간인데, 공기는 한낮처럼 뜨거웠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몇 단어는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풀렸다. [전사] [시험] [무진성] 뜻이 저절로 이해됐다. 머릿속에서 낱말들이 조립되는 느낌이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마치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뜻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 감각이 손등의 금빛과 관련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체격이 크고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검이 걸려 있었다. 그가 뭐라고 소리쳤다. 목소리가 낮고 무거웠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눈빛만으로도 적대적이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적대적인지 아닌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그냥 위압적이었다. 다른 두 명이 다가와 내 양팔을 붙잡았다. "놔, 이거 놔요." 소용없었다. 그들의 손아귀는 단단했다. 손가락이 팔뚝을 파고들 정도였다. 저항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절벽 위에서 죽음과 맞닿아 있던 몸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손에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끌려가듯 걷기 시작했다. 등 뒤로 배낭이 덜렁거렸다. 안에 초콜릿과 선글라스가 그대로 있었다. 그 사소한 물건들이 지금 이 상황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걷는 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갑옷을, 어떤 이는 낡은 천을, 또 어떤 이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였다. 모두가 나를 흥미롭다는 듯, 혹은 안타깝다는 듯 쳐다봤다. 돌길을 따라 걸으니 거대한 원형 건물이 보였다. 돌과 철이 뒤섞인 이상한 구조였다. 벽에는 알 수 없는 빛나는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무술 도장 같기도 했고, 공장 같기도 했다.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진동이 느껴졌다. 땅을 통해 울리는 낮은 소음. 함성 같기도 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심장이 그 진동에 맞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함성이 들렸다. 수많은 사람이 원형 경기장 같은 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관중석은 계단식으로 높이 쌓여 있었고, 그 위로 수백, 수천 명의 인파가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중앙에는 커다란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둥근 원판과 팔 모양의 측정기. 용도는 짐작이 갔다. 기계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사람이 순서대로 그 장치에 손을 얹었다. 장치가 빛나며 숫자를 뿜어냈다. 그 숫자를 보고 관중이 환호하거나, 야유하거나, 침묵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건, 뭐 하는 데야."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나를 붙잡은 두 사람은 여전히 팔을 놓지 않았다. 그들의 걸음은 점점 그 기계 장치를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장치 앞에 서는 순간, 뭔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금빛 선은 여전히 팔뚝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작은 빛이 맥박처럼 뛰었다. 이게 뭔지, 왜 나에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 빛이 나타난 순간부터 모든 게 변했다는 것뿐이었다. 관중 중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수백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나는 이제 여기, 이 낯선 세계에 서 있었다. 돌아갈 방법도,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경기장 한복판으로 끌려가는 발걸음만이 유일하게 확실했다. 그리고 그 기계 장치 앞,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형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지금까지 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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