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숫자가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1.
0.
1, 9.
1019kg.
소음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관중석에서 웅웅거리던 소리가 이제는 하나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파도 속에 내 이름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는 그냥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손가락질을 당하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등 뒤가 따가웠다.
"오류가 아니잖아."
누군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낮고, 확신에 차 있었다.
확신이라는 건 무섭다.
근거가 있어서 확신하는 게 아니라, 확신하고 싶어서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박정호는 서판에 뭔가를 적었다.
그의 손끝이 서판 위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 짧은 멈춤 안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지나갔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1초, 아니 2초쯤일까.
그 2초가 나에게는 20초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뛰는 속도로 시간을 재면, 아마 그 정도였을 것이다.
박정호의 눈이 서판에서 원판으로, 원판에서 내 얼굴로 옮겨졌다.
그 순서가 마치 계산 공식 같았다.
데이터를 확인하고, 결과를 대조하고, 마지막으로 원인을 지목하는 순서.
"장치를 확인하겠소."
박정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들렸다.
감정이 아니라, 계산이 어긋난 사람의 목소리.
나는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목소리는 늘 같은 높이, 같은 속도였다.
기계처럼.
아니, 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정확함에 아주 작은 흠집이 생겼다.
측정기 담당 요원 두 명이 다가와 원판을 살폈다.
뭔가를 두드리고, 뭔가를 조였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손등이 계속 뜨거웠다.
이상한 열이었다.
불에 데인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손등만 뜨거웠다.
아까 그 금빛 마디가 있던 자리.
그 자리가 마치 아직도 뭔가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열을 내고 있었다.
나는 손을 옷자락에 슬쩍 문질렀다.
소용없었다.
요원 하나가 원판 아래쪽 덮개를 열었다.
안에서 가느다란 선들이 얽혀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무슨 원리로 무게를 재는 건지 나는 몰랐다.
저울인데, 그냥 저울이 아니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뭔가를 재는 저울.
그게 뭘까.
질량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이상 없습니다."
첫 번째 요원이 말했다.
두 번째 요원이 원판 표면을 손바닥으로 몇 번 눌렀다.
원판은 미동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건 사람이 손으로 누른다고 흔들리는 물건이 아니었다.
"장치는 정상입니다."
요원 하나가 보고했다.
박정호는 다시 나를 봤다.
그 시선이 이번엔 아까보다 더 길었다.
스캔하듯이.
아니, 스캔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해부하듯이.
"소환구역 출신이라 했지."
"네."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신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새벽, 대기실에서였을 것이다.
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도 감이 없었다.
"소환구역에서 어떤 훈련을 받았소."
"훈련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습니다. 산타를 배운 적은 있는데—"
"산타가 뭐요."
"권투 비슷한, 발차기와 주먹을 쓰는 무술입니다."
박정호는 그 말을 서판에 적지 않았다.
대신 나를 오래 쳐다봤다.
그 시선이 내 손을, 정확히는 손등의 흔적을 훑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피하면,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런데 숨기는 게 없어도 시선을 마주하는 건 힘들었다.
눈을 마주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손을 보이시오."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금빛 마디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평범한 살가죽.
손톱 밑에 낀 흙 조금.
등산할 때 생긴 굳은살.
박정호가 그 손을 잡을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잡지는 않았다.
그저 눈으로만 훑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관절 하나하나.
마치 그 손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군."
박정호가 말했다.
그 말투에는 실망이 아니라 의심이 더 짙게 깔려 있었다.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증거가 없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증거가 없을수록 더 깊어진다.
증거가 있었다면 오히려 이 상황이 쉬웠을 것이다.
탈락이든, 인정이든, 뭔가 하나로 정리가 됐을 테니까.
그런데 아무 증거도 없이 1019라는 숫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숫자가 나를 대변하고 있었다.
증거 없는 결과.
가장 다루기 힘든 종류의 결과.
"장치에 조작을 가할 방법이 있소?"
박정호가 요원들에게 물었다.
"이론적으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소환구역 출신 중 일부는 특수한 이능을 가진 채 넘어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말에 관중석이 다시 들끓었다.
나는 그 소리 속에서 내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빨랐다.
지나치게 빨랐다.
이능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녔다.
누군가는 그 말을 두려움처럼, 누군가는 그 말을 흥미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 말은 그냥 낯선 단어였다.
나에게 이능이 있다면, 나는 왜 그걸 몰랐을까.
아니, 정말 몰랐던 걸까.
그 금빛 마디, 그 순간의 감각.
그게 이능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질문이 질문을 낳았고,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보류."
박정호가 짧게 말했다.
그 한 단어가 원판 위에, 아니 원판 위 허공에 여전히 떠 있는 1019라는 숫자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보류라니, 통과도 탈락도 아니라는 겁니까?"
누군가 관중석에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불만이 섞여 있었다.
왜 불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탈락시켜야 마땅한 존재를 봐준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반대로 통과시켜야 할 존재를 붙잡아둔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나는 그 판단의 대상이었다.
"이 응시자의 판정은 다음 조사가 끝날 때까지 유보하겠소."
그는 서판에 큰 글씨로 뭔가를 적었다.
나는 그게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붉은색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했다.
붉은색이면 탈락.
그러니 아직은, 아직은 괜찮은 걸까.
괜찮다는 말이 이렇게 얇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얇은 유리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금이 가지는 않았지만, 언제 갈지 모르는.
"뒤로 물러나시오. 다음 응시자."
나는 원판 앞에서 물러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승리도 아니고 패배도 아닌, 이 애매한 상태가 몸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면서 나는 발밑을 봤다.
땅은 그대로였다.
흔들리는 건 땅이 아니라 나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몇 걸음이 더 필요했다.
대열 뒤쪽으로 걸어가는데, 한서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게 인사인지, 그냥 다음 순서를 준비하는 몸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동정도, 경계도 없었다.
그저 관찰.
나를 관찰하는 눈.
그 눈이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물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다음, 한서린."
호명이 울렸다.
그녀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등에 멘 검이 걸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그 떨림이 두려움인지 긴장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도 나처럼, 이 순간 자기 몸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딘가 닮아 있는 걸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 만큼 편한 상황이 아니었다.
원판 앞에 섰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떠 있었다.
하나는 붉고, 하나는 희었다.
붉은 해가 이상하게 낮게 걸려 있었다.
원판 표면에 그 빛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그 번쩍임이 그녀의 눈을 스쳤다.
그녀가 눈을 찡그렸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는 게 보였다.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 짧은 동작 안에 얼마만큼의 각오가 담겨 있는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 각오가 나의 것과는 다른 종류라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원인도 모르고 결과를 얻었다.
그녀는 지금, 정면으로 결과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