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동네 뒷산 구품 토지신

2화

번개가 다시 산을 훑고 지나갔다. 사당 안이 하얗게 밝아졌다가 이내 캄캄해졌다. 빗줄기는 지붕을 두드리다 못해 이제는 아예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무 문짝 틈으로 스며든 빗물이 발밑을 적셨다. 나는 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흙으로 빚은 몸뚱이는 이미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코끝은 뭉툭하게 닳아 형체만 겨우 남았고, 한쪽 팔은 어깨부터 떨어져 나가 흔적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다. 몇백 년은 됐을 성싶은 몰골이었다. "영감님도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데서 몇백 년을 버티셨으니."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신상은 그저 어둠 속에서 나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고, 천둥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콰르릉! 사당 바로 뒤편의 고목이 그대로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귀가 먹먹했다. 땅이 울리는 것이 등짝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이러다 사당까지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온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했다. 분명 나는 사당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웅크린 채 눈을 감은 소년. 삼밭골에서 태어나 열여섯 해를 살아온, 낯익은 내 얼굴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저게 나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지금 이 상태가 그것이었다. 두려움보다 먼저 온 것은 이상한 차분함이었다. 몸도 없이 붕 뜬 채로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낡은 깃발도, 구석에 쌓인 먼지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다. 다만 나만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나는 신상 발치께에서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연기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연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천천히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그 연기는 흔들림 없이 곧게 뻗어 올라갔다. 그 연기가 향하는 곳에 작은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대나무 촉. 색이 바랜 옥으로 감싸인 그것이 신상의 갈라진 틈새에 끼워져 있었다. 여태 한 번도 눈에 띈 적 없던 물건이었다. 이 사당을 드나든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저런 게 있었나 싶었다. 나는 홀린 듯 그쪽으로 이끌려갔다. 몸이 없는데도 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땅을 딛는 감각도 없이, 그저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대나무 촉 표면에 아주 작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낡고 흐릿했지만, 분명 글자였다. 한 획 한 획이 마치 칼끝으로 눌러 새긴 것처럼 깊고 단단해 보였다. 아버지가 그렇게 붙잡고 가르치려 했던 그 글자들. 서당 문턱만 밟으면 도망치기 바빴던 그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훈장님 회초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저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지겨웠다. 평생 도망만 다녔던 것이 하필 이 순간에 눈앞에 있었다. 연기는 여전히 피어오르며 그 글자들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저것을 읽으라고, 누군가 일부러 불을 밝혀준 것처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자, 두 자. 뜻은 몰라도 모양만은 눈에 익은 글자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빗소리도, 천둥도, 심지어 내 몸에서 빠져나온 이 이상한 감각마저도 전부 사라진 듯했다. 오직 그 대나무 촉에 새겨진 글자만이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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