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원시부족 생존 설계자

1화

새벽 공기는 살을 벨 듯 차가웠다. 나는 이 몸의 이름으로 도래라고 불렸다. 원래 이름은 이현재였다. 서울 어느 병원 침대에서 심장이 멈추던 순간까지도 나는 스물아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열세 살짜리 뼈밖에 안 남은 몸에 들어와 있었다. 손목만큼 가느다란 팔로 나는 물통을 끌고 있었다. 짐승 위장으로 만든 물통이었는데, 안에 든 물의 무게만으로도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백두부족의 움막들이 늘어선 공터를 가로질러야 했다. 움막은 대부분 마른 풀과 짐승 가죽을 엮어 만든 것들이었다. 지붕 높이는 내 키의 두 배쯤 됐고, 입구마다 짐승 뼈로 만든 장식이 걸려 있었다. 그 장식이 많을수록 안에 사는 전사의 사냥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사흘 만에 알아냈다. 이 부족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빨라야 했다. 누가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 누구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씩 익혀가는 중이었다. '배고파.'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벌써 이틀째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었다. 어제 받은 건 상한 열매 몇 알이 전부였고, 오늘 아침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배급을 관리하는 노파는 나 같은 노예 아이들에게 늘 마지막 순서를 줬다. 남는 게 있으면 주고,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식이었다. 오늘은 없는 날이었다. 뱃속이 텅 빈 채로 물통을 끌다가, 나는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물통이 옆으로 쓰러지며 물이 반쯤 쏟아졌다. '망했다.' 식수는 부족 안에서도 귀한 것이었다. 우물까지 왕복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고, 그 물을 긷는 인원도 정해져 있었다. 이만큼 흘렸다는 게 알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나는 재빨리 남은 물을 손으로 퍼서 다시 담으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줄줄 흘러나갔다. 땅에 젖은 흙 위로 물이 스며드는 걸 보면서, 나는 숫자를 셌다. 이대로 가면 오늘 배급받을 물의 절반도 안 남는다. 이 상태로 우물까지 다시 갔다 오려면 최소 한 시간. 그 한 시간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가장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돌각이 돌아와 있었다. 돌각은 백두부족에서 제일 덩치가 큰 전사 중 하나였다. 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돌도끼가 있었는데, 날 부분에 말라붙은 짐승 피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어깨에는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사냥감의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 사냥대가 삼 일 만에 복귀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일주일 전, 저 남자는 나를 처형하려 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을 것을 축내는 쓸모없는 노예 새끼라는 것. 그날 나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뭐라고 지껄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아무 말이나 쏟아냈고, 그중 하나가 우연히 추장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었다. "이 새끼, 아직도 살아 있었네." 돌각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반가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물을 흘렸어." 짝! 그의 발이 내 옆구리를 걷어찼다. 나는 물통 위로 쓰러지며 숨이 턱 막혔다. "쓸모없는 벌레 새끼가 물통 하나 제대로 못 들어?" 돌각이 소리쳤다. "어... 어. 다시... 채울게."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채워? 이미 늦었어." 돌각이 도끼를 들어 보였다. 도끼날에 붙은 마른 핏자국이 아침 햇빛을 받아 검붉게 번쩍였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이 몸의 심장은 원래도 약했다. 도래라는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이리부족이 몰살당하기 전에도 늘 골골거렸다고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약한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돌각이 낮게 말했다. "추장님한테 다시 물어봐야겠어. 저번에 네가 지껄인 그 헛소리가 진짜인지." 나는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헛소리라니, 나는 헛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식량이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증명하지 못하면 그건 헛소리가 된다. 그리고 헛소리를 지껄인 노예는 처형당한다. 돌각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움막 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직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쏟아진 물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손이 떨렸다.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밤.'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시간을 계산해봤다. 지금이 아침이니까, 밤까지는 대략 열 몇 시간. 그 안에 뭐라도 하나 보여줘야 한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도토리를 물에 담가 독을 빼는 방법. 특정 버섯의 무늬로 독성을 구분하는 법. 곰팡이 핀 곡물을 발효시켜 새로운 맛을 만드는 법. 전생에서는 그냥 상식이었던 것들이, 이 세계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값진 것이 됐다. 하지만 그걸 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재료가 필요했다. 도토리든 버섯이든 뭐든, 손에 쥘 수 있는 것부터 구해야 했다. 나는 젖은 물통을 다시 끌고 우물 쪽으로 향했다. 걸음이 무거웠다. 뱃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옆구리는 방금 맞은 자리가 욱신거렸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옆구리에서 뜨거운 통증이 올라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걸었다. 우물 근처에는 다른 노예 아이들도 몇 있었다. 나처럼 이리부족 출신이거나, 다른 부족에서 잡혀온 아이들이었다. 다들 표정이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물을 긷다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편발로 머리를 묶었고, 목에는 짐승 뼈로 만든 작은 장식을 걸고 있었다. 노예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아이가 노예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이미 몸으로 배운 뒤였다. 이 부족에서는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매를 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먼저 다가왔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나는 물통을 붙든 손에 힘을 줬다. "너, 저번에 추장님한테 뭐라고 했다며." 그가 물었다. 목소리에는 노예를 대하는 흔한 무시가 섞여 있지 않았다. 나는 대답 없이 물통에 물을 채우는 데만 집중했다. "야, 못 들었어?" 그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가 조금 더 컸다.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이 아이의 이름조차 몰랐다. 하지만 이 이름 없는 소년이, 앞으로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는 건 그때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나는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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