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련님, 눈먼 제가 보이나요

4화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유겸은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보이지 않는 눈이었지만, 그 방향으로 얼굴을 향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었다. 발걸음의 무게, 그 사이의 간격,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까지도 유겸은 놓치지 않았다. 가벼웠다. 그러나 그 가벼움 속에는 이상할 정도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발밑에 놓여 있다는 듯한,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는 걸음걸이였다. "이것이었군요." 낮고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원골을 각성했다는 그 흙냄새 나는 아이." 유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수십 명의 숨죽인 기척, 그리고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두려움의 냄새로, 예사롭지 않은 존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람마저 그 존재를 피해 흐르는 듯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누군가는 숨을 참고 있는지 아주 작은 딸꾹질 소리가 새어 나왔다가 곧바로 끊겼다. "...누구십니까." 유겸이 물었다. "이름은 중요치 않습니다." 소년이 담담하게 답했다. "당신에게, 나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일 테니까요."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 바구니, 뭡니까?" 유겸의 손이 반사적으로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그 안에는 며칠 전 산 중턱에서 캐낸 약초 몇 뿌리와, 다 낡아 헤진 천 조각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천 조각은 원래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던 흔적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 텅 빈 천이 유겸에게 무슨 의미인지. "제 것입니다." "보여주시지요." "안 됩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안 된다." 소년이 그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 "재미있군요. 이 학원에서 나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자는 처음입니다." 주변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누군가 소년의 정체를 알아본 듯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학원생 하나가 옆 사람에게 귀엣말로 무언가를 속삭이다가, 소년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향하는 듯하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저기, 저 아이는 원골이 각성했으나 원력을 다루지 못하는 결함이 있는 아이입니다." 육명봉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목소리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결함이 있는 원골이라." 소년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그가 유겸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발밑의 흙이 가볍게 눌리는 소리가 유겸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 바구니를 보여주면, 나도 흥미가 사라져 그냥 지나갈 것입니다." 유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밑을 다시 짚으며, 몸을 낮췄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 안이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천 조각만큼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함부로 내보일 수 없었다. 그것은 유겸의 전부였고, 유일하게 남은 온기였다. "...안 됩니다." "고집이군요." 소년의 손이 천천히 뻗어왔다. 유겸은 그 손의 움직임을 소리와 바람의 흐름으로 느꼈다. 손끝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공기의 파동, 그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몸으로 읽어낸 것이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바구니를 지키려 했다. '스릉.' 하지만 그 손은 이미 유겸의 손목을 낚아채고 있었다.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 마치 유겸의 움직임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어...!" 유겸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퍽!' 등이 나무 밑동에 부딪혔다. 숨이 턱 막혔다. 등뼈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크윽..." 유겸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바구니가 있던 방향을 향해 뻗어 있었다.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자는, 그 이유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소년이 조용히 다가와 바구니를 발로 밀었다. 안에 담긴 약초 몇 잎이 쏟아졌다. 그 사이로 낡은 천 조각이 흙 위에 나뒹굴었다. "이런 잡풀 따위가 무엇이 그리 소중하다고." 유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숨이 가빴지만, 그는 다시 바구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 떨림이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유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만두시오!" 그때 이청운이 앞으로 나섰다. "저 아이는 학원의 제자입니다. 이유 없는 폭행은..."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평소 학원 내에서 이청운이 지니고 있던 위치, 그 지위에서 나오는 여유이자 자신감이었다. 지무경 급의 실력자로서, 그는 자신이 이 상황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소년의 시선이 이청운에게 옮겨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눈빛이 마주친 것. '쿠웅!' 이청운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무런 전조도, 아무런 동작도 없었다. 그저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 그의 몸은 마치 거대한 힘에 짓눌린 듯 그 자리에서 붕괴했다. "청운!" 남궁유리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청운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뭐, 뭐가..." 그가 신음을 삼키며 겨우 내뱉었다. "저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야..."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방금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겪었는지조차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소년은 이청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무경 정도의 실력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그가 나직이 웃었다. "우습군요." 주변에 몰려든 학원생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 여학생은 헛구역질을 하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른 학원생들도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예 뒤돌아 도망치려다 다리가 풀려 넘어졌다. "이, 이 정도 격차라니..."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곧 다른 누군가의 흐느낌에 묻혀 사라졌다. 남궁유리는 이청운을 부축한 채, 소년을 향해 처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이청운의 옷깃을 움켜쥔 채 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년은 다시 유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다시 물어보지요." 그가 유겸의 앞에 몸을 낮췄다. 그 움직임에서는 조금의 서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바구니, 보여줄 수 있습니까?" 유겸의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손끝에 흙과 약초 냄새가 스쳤다. 그 냄새 너머로, 오래전 어머니의 손길이 남긴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안 됩니다." 소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흥미롭군요. 원골도 결함이 있고, 눈도 보이지 않고, 이렇게 압도적인 격차 앞에서도 고집만 남았다니."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유겸의 가슴 언저리를 짚었다. 원골이 자리한 자리였다. 손끝이 닿은 순간, 유겸의 몸속에서 낯선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 고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봐야겠군요." 유겸의 등줄기로 서늘한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언가에 의해 낱낱이 해체되는 듯한, 근원적인 위협감이었다. "...!" 그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주변의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학원생들의 웅성거림도, 남궁유리의 흐느낌도, 바람 소리조차도 유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오직 소년의 손끝에서 뻗어 나오는 그 서늘한 감각만이 유겸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의 손끝에서 뭔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