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심한 아버지, 각성한 차남

1화

기풍대륙 동남 끝, 인현성. 천강산맥의 그늘 아래 자리 잡은 이 작은 성은 예로부터 황수의 재앙을 가장 먼저 받는 곳으로 이름났다. 겨울이면 산맥에서 내려오는 냉기가 성벽을 타고 넘어와 저택 담장 아래 서리를 앉혔고, 여름이면 황수의 습기가 나무 기둥을 갈라놓았다. 나는 그곳의 성주, 인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인천. 올해로 여덟 살이었다. 사흘 뒤면 아홉 살이 된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형은 이미 관무를 이유로 도성에 나가 한 달 넘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하인들은 성주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생일이란 것은 이 집에서 그저 지나가는 하루였다. "팔은 더 곧게. 어깨에 힘을 빼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늘 그런 식이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지시서를 읊는 듯한 어조. 나는 목검을 고쳐 잡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뒷마당의 흙바닥은 벌써 몇 시간째 내 발자국으로 어지러웠다. 발목이 저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하는 순간 아버지의 눈빛이 조금 더 차가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 인절은 지급 4맥의 강자였다. 동남지역에서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자는 없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면 하인들이 먼저 길을 비켰고, 손님이 오면 문턱을 넘기 전부터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어딘가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와 마주 앉아 밥을 먹은 기억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손으로 세어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류아라는 이름과, 저택 안뜰에 걸린 초상화 한 점만이 그녀의 흔적이었다. 그 초상화조차 색이 바래 눈매가 흐릿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버지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짧은 한마디였다. 칭찬도, 질책도 아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목검을 내려놓았다. 그의 등은 늘 그렇게 멀어져 갔다. 걸음마다 흙먼지가 조금씩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도련님."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우문 할아범이었다. 주름진 얼굴에 흰 눈썹이 짙었고, 눈빛만은 이상하게 젊었다. 저택의 관리인이자, 내가 아는 한 가장 나를 살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늘 마른 수건을 손에 들고 다녔는데, 지금도 그것으로 내 이마의 땀을 조심스레 훔쳐주었다. "오늘은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이 다가오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저택에서, 나는 스스로 선물을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의 것이라 전해지는 물건 하나가, 성 밖 시장 어딘가에 팔려 나갔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것도 우연이었다. 부엌 여종들이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지나가다 주워들은 것이었다. 누군가 류아 부인의 유품을 가지고 있다는데, 요즘 형편이 어려워 그걸 내놓았다더라—그 한마디가 며칠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할아범, 오늘만 눈감아 주시오." "…도련님." "부탁이오." 우문 할아범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막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에 짧게 고개를 숙이고, 담장 옆 개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인현성 서쪽 저잣거리. 낮게 깔린 안개와, 좌판 위 마른 약재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길바닥은 좁고 질척했고, 상인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부딪혔다. 나는 우문 할아범 몰래 빠져나와 그곳까지 걸어왔다. 아이 혼자 걷기에는 낯선 거리였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골목을 몇 번이나 잘못 들어섰다. 행상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방향을 잡았다. 발이 아파올 즈음, 나는 그녀를 발견했다. 취란. 저택의 여종이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렸고, 눈매는 조용했지만 어딘가 서늘했다. 좌판도 아닌, 골목 안쪽 낡은 천 위에 물건 몇 개를 올려놓고 있었다. 낡은 비녀 하나, 색이 바랜 노리개, 그리고 그 곁에 놓인 작은 물건 하나.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크기의 흰색 원환. 표면에 아무런 문양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안개 속에서도 그것만은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주변의 흐릿함을 밀어내는 듯했다. "그건 팔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다가서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낮고 단호한 어조였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알아보고도 모른 척하려는 걸까. 나는 그 어느 쪽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저건 어머니 것이오?" 나는 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숨기려 했지만 숨기지 못한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원환 위로 슬쩍 움직였다가, 다시 멈췄다. "…도련님이 어찌 그것을." "소문을 들었소. 류아 부인의 물건이 시장에 나왔다고." 그녀는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안개 사이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소리만이 그 침묵을 대신 메웠다. "이건 부인께서 제게 맡기신 물건입니다. 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왜 여기 나와 있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뿐입니다." 대답이 짧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어머니의 유품을, 궁핍 때문에 내놓아야 했던 사람의 사정을 짐작할 도리는 없었다. 저택 안에서는 늘 넉넉해 보였던 그녀의 삶이, 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얼마요?" "…팔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강제로 빼앗을 생각은 없소." 나는 담담히 말했다. "군자불탈인소애(君子不奪人所愛)." 짧은 한마디였다. 군자는 남이 아끼는 것을 억지로 빼앗지 않는다는 뜻. 서당에서 배운 문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진심으로 되뇌는 말이었다. 훈장이 그 구절을 가르칠 때는 그저 시험을 위한 글자였을 뿐인데, 지금은 어딘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취란의 표정이 굳었다. 여덟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놀라움과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도련님께 팔겠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신다면." "얼마든지." 나는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았다. 용돈으로 모아둔 은자 몇 냥과, 아끼던 옥패까지. 품 안쪽 깊숙이 넣어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는 손이 조금 떨렸다. 그녀는 처음엔 거절하다가, 결국 옥패만 남기고 은자를 받아들였다. "이것까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옥패를 내 손바닥 위에 다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 손길이 뜻밖에도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흰 원환을 내 손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이었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얼음물에 손을 담근 듯한 감촉이었다. 원환 표면에서 미세한 백색의 빛이 번지듯 흘러나왔다. 안개 속에서도 그 빛만은 유독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이게, 뭐지." 취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는 뒷걸음질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다른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조차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건, 그럴 리가…"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조용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떨림이었다. 그녀는 내 손안의 원환을 다시 빼앗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물러서야 하는 것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내 손 안의 원환은, 마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것이 깨어나듯, 낮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진동은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서서히 번져 올라왔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안개 저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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