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현선학원 정문 앞은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였다.
합격자 명단이 붙은 벽 앞으로 몰려든 인파가 서로 밀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환호했고, 누군가는 낙담한 얼굴로 돌아섰다.
종이 한 장에 인생의 방향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명단을 훑었다.
내 이름은 상위권에 걸려 있었다.
淬體八重이라는 성취가 명단 옆에 함께 기재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그 숫자를 보고 놀란 눈치들이 스쳐 갔다.
병약하기로 유명했던 이서준이라는 이름과, 淬體八重이라는 성취.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몇몇의 시선이 힐끗힐끗 내게 꽂혔다.
호기심과 의심이 섞인 눈빛들이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갈 관심은 아니었다.
"이서준!"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돌아보니 박대호였다.
구릿빛 피부에 다부진 체격.
땀에 절어 있는 무복을 입고도 씩 웃는 얼굴이 언제나처럼 시원스러웠다.
이 새벽부터 벌써 몸을 풀고 온 모양이었다.
"들었다, 소문. 시험장이 발칵 뒤집혔다며?"
대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말투에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진법이 오작동한 거 아니냐, 감독관이 다시 재보려고 진법 부순 거 아니냐, 아주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오더라."
나는 옅게 웃었다.
"그저 진법이 예민했을 뿐이야."
"겸손은."
대호가 팔로 목을 감으며 웃었다.
목이 살짝 조여드는 힘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난 淬體八重 원만이다. 너랑 붙어보고 싶었는데, 이제 진짜 실력을 봐야겠어."
박대호는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어릴 적 중병을 앓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를, 의부님이 손수 살려낸 인연이 있었다.
그날의 은혜를 대호는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이후로 대호는 늘 내 편이었다.
싸움이 나면 먼저 나섰고, 뭔가 필요하다 싶으면 묻지도 않고 챙겨왔다.
투박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이제 좀 낫냐, 몸은?"
대호가 팔을 풀며 걱정스레 물었다.
목소리에 장난기가 빠지고 진지함이 스몄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의부님의 상태를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이 얘기를 꺼내면 대호는 분명 당장이라도 의가에 달려가려 할 터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확실한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혼자 짊어질 무게였다.
"괜찮아."
짧게 대답했다.
대호가 뭔가 더 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이 좋았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건가."
조현이었다.
황민재를 비롯한 몇몇 패거리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발걸음마다 여유가 넘쳤다.
이미 승자의 얼굴이었다.
대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넌."
조현은 대호를 무시하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말끔한 얼굴.
눈빛만은 차갑게 벼려져 있었다.
"진법의 오류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그가 낮게 말했다.
"체환진이 병약한 몸을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는 거지."
주변에 서 있던 몇몇이 술렁였다.
조현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8년을 병약하게 살아온 나였으니까.
그 세월을 지켜본 이들이 이곳엔 많았다.
황민재가 끼어들었다.
"솔직히 말해봐. 어떻게 그런 진기가 나와? 넌 씻기도 힘든 몸이었잖아."
그가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곁에 선 패거리 두어 명도 따라 낄낄거렸다.
나는 침묵했다.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말로 증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증명은 오직 몸으로 하는 것.
그것이 이 세계의 규칙이었다.
조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 침묵이 자신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는 것에 오히려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의심스러우면 확인하면 될 일이지."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현선선발전 예선, 비무 상대로 널 지목하겠다."
장내가 순간 조용해졌다.
비무는 정식 규율에 따른 도전이었다.
한번 지목되면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은 곧 겁쟁이라는 낙인이었고, 신입생 사이에서 그 낙인은 평생 갈 수도 있었다.
대호가 발끈했다.
"야, 너 그거 억지 아니야? 이제 막 붙은 신입한테 다짜고짜 비무 지목이라니."
조현은 대호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나를 향했다.
"규율은 규율이다."
그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진짜 실력인지, 아니면 진법의 오류였는지… 이번에 확실히 가려주지."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이 섞인 미소였다.
"淬體八重 원만인 나를 상대로, 병약이가 얼마나 버틸지 궁금하군."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다들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눈빛을 반짝였다.
누군가는 벌써 판돈이라도 걸 태세였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음속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반년 안에 淬體九重을 넘어야 하는 상황.
이런 자잘한 도발에 흔들릴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도 하나의 기회였다.
현선선발전 명액은 단 여덟 개.
조현은 분명 그 여덟 안에 들 실력자였다.
정면으로 붙어볼 상대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미리 그의 밑천을 확인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淬體八重 원만이라 자부하는 자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벽을 지녔는지,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큼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좋다."
짧게 대답했다.
조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상보다 담담한 대답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쩌면 내가 겁을 먹고 물러서길 바랐던 걸지도 몰랐다.
"…후회하지 마라."
그가 낮게 내뱉고는 돌아섰다.
황민재와 패거리가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멀어지는 발소리 사이로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대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에서 걱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괜찮겠어? 저 자식 진짜 독한 놈이야. 영약도 이것저것 써서 몸을 키웠다던데. 집안에서 밀어주는 것도 상당하다고 들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근데 왜 받아들여? 피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
대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벗에게조차 아직 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의부님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을.
반년이라는 시한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둘 게 있어서."
짧게만 답했다.
대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어깨를 한 번 꽉 쥐고는, 이내 씩 웃었다.
"뭐가 됐든, 그날 내가 옆에 있어줄게."
그 말이 묘하게 든든했다.
비무는 사흘 뒤, 현선학원 연무장에서 열린다고 했다.
전교생이 지켜보는 앞에서였다.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내가 명단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도, 벌써 여기저기서 비무 얘기가 들려왔다.
淬體八重 신입과 淬體八重 원만의 격돌.
누군가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소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확인해야 할 진실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 맑음과는 대조적으로, 가슴 한편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반년 안에 넘어야 할 벽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막 실감하고 있었다.
조현.
淬體八重 원만.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자.
사흘 뒤, 그 벽의 높이를 직접 재보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