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유능한 말단, 신비한 솥을 얻다

4화

남주시 유물시장. 낡은 물건들이 좌판 위에 널려 있는 골목이었다. 영수 관련 부속품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물까지, 온갖 게 다 있었다. 원래는 스트레스를 풀러 온 거였다. 먼지 쌓인 물건들을 구경하다 보면 생각을 잠시 끌 수 있었다. 연구소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강호가 넘긴 서류, 다음 주까지 처리해야 할 계약 건, 그리고 요 며칠 계속 신경 쓰이던 진월희의 눈빛까지. 그냥 걷다 보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시장 골목은 오늘도 사람이 적었다. 좌판 주인들은 반쯤 졸린 얼굴로 앉아 있고,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소리만 골목을 채웠다. 나는 별 목적 없이 좌판들을 훑었다. "이거 얼마예요?" 한 좌판 구석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녹슨 청동 솥이었다. 크기는 작은 화분 정도. 다리가 세 개, 손잡이도 두 개.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얕게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문양이 한 방향으로 흐르듯 이어져 있었다. 마치 물결 같기도 하고, 아니면 뭔가를 감싸고 있는 모양 같기도 했다. "그거요?" 주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고물이에요. 그냥 골동품." "진짜 골동품이에요?" "글쎼, 나도 몰라요. 창고에서 나온 거라." 주인은 대충 값을 불렀다. "오만 영화." 그 값이 너무 저렴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원래 이 시장에서 청동기라는 이름만 붙어도 못해도 몇십만 영화는 부르는 게 정상이었다. 나는 솥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바닥에 미세한 균열이 있었지만, 깨진 건 아니었다. 손잡이 하나는 살짝 휘어 있고, 다리 하나는 다른 것보다 짧았다. "싸네요." 내가 말했다. "싼 만큼 값어치도 없다는 뜻이죠." 주인이 웃었다. "그냥 장식용으로나 쓰세요. 화분 받침대 해도 되고." 나는 그냥 그걸 샀다. 오늘 하루가 너무 엉망이었으니까. 뭐라도 하나 손에 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비닐봉지에 담긴 솥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이상하게 손끝이 시렸다. 날씨는 딱히 춥지 않았는데도. 집으로 돌아와 솥을 씻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어서 물로 몇 번을 헹궈야 했다. 수돗물 아래에서 문양이 조금씩 드러났다. 씻어낼수록 청록색 녹 사이로 원래의 색이 언뜻 비쳤다. 검붉은 빛깔이었다. 청동이라기엔 좀 이상한 색이었다. 손으로 표면을 문지르는 순간이었다. 찌릿. 손끝에서 이상한 감각이 올라왔다. 전기가 통한 것도 아닌데, 저릿한 느낌이 팔뚝까지 번졌다. '뭐지.' 나는 솥을 놓고 손을 봤다. 아무 이상 없었다. 손가락을 몇 번 쥐었다 펴봤다. 다시 만졌다. 또 그 느낌. 이번엔 더 확실했다. 마치 솥 안에서 뭔가 아주 작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숨을 죽였다. 귀를 가까이 댔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착각인가.' 싱크대 불빛 아래서 솥을 다시 살폈다. 문양이 조명을 받아 얕은 음영을 만들었다. 그 음영이 꼭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요즘 너무 예민한가 보다.' 나는 솥을 부엌 한구석에 올려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며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부엌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 두 번이나 나가봤지만, 솥은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다음 날, 강붕바이오라는 회사에서 연구소로 공문이 하나 왔다. 영수 사료용 특수 배합 물질 관련 계약 건. 내가 담당하게 된 일이었다. 원래는 이강호가 맡을 일이었는데, 이번엔 그가 슬쩍 나에게 넘겼다. "이건 임 과학원이 하시죠." 이강호가 서류를 밀어주며 말했다. 웬일로 순순히. "왜 갑자기요?" 내가 물었다. "거기 부장이 좀 까칠하대. 임 과학원이 워낙 침착하니까, 잘할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은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귀찮은 일이니까 넘긴 거겠지.' 서류를 챙기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강호는 이럴 때만 꼭 사람 좋은 척을 했다. 강붕바이오 사무실에 도착했다. 건물은 생각보다 낡았다. 로비 벽에는 회사 창립 30주년 기념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부장 박태식이 자리에서 나를 맞았다. 40대 중반, 복부가 불룩한 체형에 넥타이를 헐렁하게 맨 남자였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대충 손을 내밀었다. "어디서 오셨다고?" 그가 물었다. "남주시 영수 연구소, 1조 임서준입니다." "1조? 거기 뭐 별거 있나." 박태식은 서류를 대충 훑어보더니 던지듯 말했다. "이 조건으로는 계약 못 해요. 너무 후하게 요구하시네." 그는 서류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 가격에 이 정도 물량이면 우리가 손해예요, 손해." 나는 조목조목 설명했다. 원가 계산, 시장 시세, 연구소 규정. 표를 하나씩 짚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박태식은 계속 딴 얘기를 했다. "요즘 젊은 공무원들은 다 그런가. 서류만 잘 만들면 다 되는 줄 알고." 말투가 점점 무례해졌다. 그는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고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봤다. 마치 시간 낭비라는 표정이었다. "이 조건 안 되면 저희도 다른 계약처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박태식이 손을 흔들며 서류를 밀쳤다. 서류 몇 장이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그걸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비웃음 같은 시선이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뜻밖에도 진월희였다. 출장 겸사겸사 들렀다는 얘기를 아침에 듣긴 했다. 그녀가 들어오자 사무실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직원들 몇몇이 슬쩍 자세를 고쳐 앉는 게 보였다. "임서준 씨." 그녀가 나를 불렀다. "계약 진행 상황은요." "거절당했습니다." 박태식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기색이 살짝 스쳤지만 금세 다시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다. "아, 조장님도 오셨네요. 이거, 젊은 직원분 서류가 너무..." "제가 확인했습니다." 진월희가 딱딱하게 말을 잘랐다. "조건 정당합니다." 박태식은 여전히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진월희를 향해서도 은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장님, 저희도 이런 식으로 계속 손해 볼 순 없어서요. 회사 사정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진월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박태식의 명찰을 잠시 내려다봤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위압적이었다. "박 부장님." 진월희가 그의 명찰을 살짝 보더니 말했다. "진명 소장님 이름 들어보셨어요?" 순간 박태식의 표정이 변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진... 진명 소장님이요?" "제 삼촌입니다." 사무실 안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박태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그는 몇 번이나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아이고, 진작 말씀하셨으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명함을 다시 꺼내며 굽신거렸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심지어 명함을 두 손으로 받쳐 내밀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계약 조건, 원래대로 다 맞춰드릴게요. 저희가 뭘 몰랐네요, 하하." 삽시간에 계약은 통과됐다. 지급액은 7천만 영화. 원래 요구했던 것보다 오히려 더 후한 조건이었다. 박태식은 서류에 도장을 찍는 손까지 떨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같은 서류, 같은 조건. 달라진 건 그저 '이름' 하나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무시하던 사람이, 이제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게 이 사회구나.' 허탈함과 동시에 이상한 확신이 생겼다. 힘이 없으면 아무리 옳아도 소용없다. 나는 서류를 정리하며 그 생각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월희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차창에 스치는 가로수 불빛이 그녀 얼굴 위로 지나갔다. "실력 좋은 건 알겠는데." "...감사합니다." "제 이름 아니었으면 계약 못 됐을 거예요." 그 말이 유독 차갑게 들렸다. 하지만 어딘가, 아주 살짝 다른 톤이 섞여 있었다. 마치 동정 같기도 하고, 안타까움 같기도 한. '이 사람, 뭘 알고 있는 거지.' 나는 그 표정을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곧 눈을 돌렸다. 창밖 풍경을 보는 그녀의 옆얼굴에는 뭔가 다른 생각이 스치는 듯했다. 나는 괜히 묻고 싶은 걸 삼켰다. 지금 물어봐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으니까.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엌 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탄내 같기도 하고, 쇠 냄새 같기도 한. 나는 신발도 벗지 않고 부엌으로 뛰어갔다. 솥이 있던 자리, 그 구석에서. 검은 연기가 아주 얇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앞에 섰다. 솥 표면의 문양이, 어젯밤보다 훨씬 선명해져 있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듯 그 문양이 아주 천천히, 정말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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