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게시판 앞이 조용했다.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했다. 형광등 하나가 파르르 떨리며 깜빡였다. 나는 그 아래 서서 종이를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임서준' 세 글자가 없었다.
분명 지난주까지 있었다. 부조장 승진 대상자 명단, 맨 위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 종이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밤마다 천장을 보며 '이번엔 진짜 될지도 모른다'고 되뇌었다. 동료들도 다들 알고 있었다. 휴게실에서 커피를 타 주며 "축하는 미리 해야지" 하고 웃던 얼굴들까지 떠올랐다.
오늘 아침, 최종 발령 공고가 붙었다.
명단은 그대로였다. 이름들 순서도, 소속도, 배정 부서도 지난주와 똑같았다.
딱 하나, 내 이름만 지워졌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뭔가 잘못됐다.'
나는 종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손가락으로 명단을 훑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시 아래에서 위까지. 다시 봐도 결과는 같았다. 부조장 자리에는 다른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낯익은 이름이었다. 나보다 입사가 삼 년 늦은, 영주 계를 하나 타고난 후배였다.
'왜.'
목이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났다. 6년이었다. 6년 동안 이 연구소에서 버틴 시간이 저 종이 한 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임 과학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강호였다.
말상처럼 긴 얼굴에, 표정을 읽기 어려운 웃음. 그는 늘 저런 얼굴로 웃었다. 좋은 소식을 전할 때도, 나쁜 소식을 전할 때도 똑같은 온도로.
"보셨어요?"
그가 물었다.
"보고 있잖아."
나는 짧게 답했다.
이강호는 게시판 앞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종이를 위아래로 훑는 눈빛이 딱히 놀라운 기색도 없었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이상하네. 확실히 통과됐다고 들었는데."
그의 말투는 태평했다.
너무 태평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저 사람은 알고 있다.'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강호는 원래 소문을 물어다 나르는 스타일이었다. 이 연구소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그가 모르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승진이 취소된 이 상황 앞에서 그는 딱 알맹이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누가 그래?"
내가 물었다.
"글쎼요."
이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위에서 결정하는 일이니까요."
위.
그 한 글자가 목에 걸렸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그냥 걸려 있었다.
남주시 영수 연구소.
영주(御灵师)들이 영수를 연구하고 다루는 곳. 이곳에서 나는 6년을 버텼다. 영주 능력이 없는, 순수한 평민 신분으로.
영주는 특별한 존재다. 오행의 기운을 다스려 영수를 부리는 자들. 풍(風), 화(火), 수(水), 지(地), 뭐든 하나라도 계를 타면 인생이 달라진다. 계를 가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르게 대우받는다. 학교에서도, 취업에서도, 심지어 결혼 시장에서도. 공무원 사회에서도 영주와 평민은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는다. 같은 시험을 봐도, 같은 일을 해도, 승진 속도가 다르고 급여 체계가 다르다.
나는 영주가 아니다. 평민이다.
그래서 6년째 정과급도 못 되는 계약직 신분으로 이 연구소를 떠돌았다. 매년 재계약 시즌마다 서류를 새로 쓰고, 매년 면접 비슷한 걸 다시 봤다. 그런데도 버텼다.
밤을 새워 데이터를 정리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현장 작업을 도맡았다. 영수 포획 현장에 나가서 진흙탕에 구르고, 부상당한 영수를 안고 뛰어서 병동까지 옮긴 적도 있었다. 그때 팔에 남은 흉터가 아직도 있다. 소장이 직접 부조장 승진을 결재했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이번엔 정말 될 줄 알았다.
'6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강호가 옆에서 서류를 뒤적이며 슬쩍 말을 걸었다.
"신임 조장님이 오시고 나서 좀 바뀐 것 같기도 하고요."
그가 슬쩍 덧붙였다.
"신임 조장?"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방금까지 승진 취소에 온 정신이 쏠려 있었는데, 그 말 한마디에 시선이 옮겨졌다.
"진월희 조장님이요."
진월희.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뭔가 시작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잊고 지낸 어떤 예감이 다시 켜지는 느낌. 이름 하나에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오늘 새로 부임하셨답니다."
이강호가 웃으며 말했다.
"인사 오시겠죠, 조금 있으면."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곰탱이 씨, 표정이 왜 그래요. 승진 못 한 거 아직도 못 믿는 거예요?"
곰탱이. 이강호가 나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체격이 크고 둔해 보인다는 이유로 몇 년 전부터 붙여진 호칭인데, 정작 본인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면서 이 별명만은 절대 놓지 않았다.
"놀리지 마."
나는 짧게 대꾸했다.
이강호는 킥킥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흐흐, 뭐 어때요. 좋게 생각하세요. 아직 기회는 남았을 수도 있잖아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나는 게시판을 다시 봤다. 지워진 내 이름 자리에 작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종이 표면이 살짝 얇아진 부분이 있었다. 누군가 지우개로 밀었거나, 다시 인쇄한 자국.
손끝으로 그 부분을 살짝 문질러봤다. 종이 결이 미세하게 달랐다.
'우연이 아니다.'
이 종이는 재출력된 것이다. 누군가 이 종이를, 이 짧은 시간 안에 다시 뽑았다. 그리고 딱 내 이름 하나만 빠뜨렸다. 다른 이름은 그대로 두고.
'누가, 왜.'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였다.
또각또각또각.
점점 가까워졌다. 규칙적이고, 흔들림 없는 걸음이었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확한 속도로.
이강호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슬쩍 자세를 바로 했다. 방금까지 킥킥거리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섰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 새하얀 피부, 눈매가 그림 같은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서류 파일을 옆구리에 낀 채,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이. 걸음걸이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복도를 걸어온 사람처럼 익숙하게.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지나갈 때마다 명암이 뚜렷하게 갈렸다. 그늘이 진 부분에서는 눈매가 더 날카로워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봤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잠깐 들렸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게시판 앞에 멈춰 섰다.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조 소속이 임서준 씨?"
여자가 나를 지나치며 물었다.
목소리에 온도가 없었다.
"네."
나는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 같은데,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짐 정리하세요."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정면을 보며, 서류 파일을 옆구리에 낀 채, 또각또각 걸음을 이어갔다.
"자리 바꿉니다."
그 한마디가 복도 안에 짧게 울렸다. 이강호가 옆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방금 벌어진 일들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승진 취소, 재출력된 명단, 새로 온 조장, 그리고 갑작스러운 자리 이동 통보까지.
'짐 정리하라니.'
여자의 걸음 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