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할 말 있어요?"
진월희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온도가 없었다.
복도 조명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백옥빛 피부가 그 빛을 그대로 반사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회의 통보가 늦게 왔습니다."
"그래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짧은 두 글자 안에 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제 자료는 사용하셨던데요."
목소리에 미묘한 압력이 실렸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자료가 좋았으니까요."
진월희가 나를 똑바로 봤다.
그림 같은 눈썹, 그 아래 짙은 눈동자.
표정은 여전히 얼음이었다.
그 얼음 밑에 뭐가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근데 제출은 못 했습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으니까요."
"참석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녀가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선고 같았다.
숨이 턱, 막혔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사람, 뭔가 다르다.'
단순한 상사가 아니었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울에 정확히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연구소 안에는 소문이 돌았다.
신임 조장 진월희, 풍계 2품 능력자.
영수 등급으로는 상위 5퍼센트 안에 드는 우월 품질의 영수를 가진 사람.
이름이 열아추풍표.
2품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나는 몰랐다.
다만 연구소 내에서 2품 이상 영주는 손에 꼽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입사한 지 한 달, 그런 사람들을 실제로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조장님."
뒤에서 이강호가 다가왔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구두 소리가 복도 타일 위에서 유독 크게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아니요."
진월희가 짧게 답했다.
이강호는 그래도 그녀 옆에 섰다.
마치 원래 자기 자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의 어깨가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임 과학원이 규정 얘기를 좀 하고 있어서요."
이강호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그 웃음이 나를 향해 있었다.
비웃음인지, 걱정인지 구분이 안 됐다.
진월희는 그를 힐끗 보더니 다시 나를 봤다.
"규정은 저도 압니다."
그녀가 말했다.
"임서준 씨."
내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성과 이름을 붙여서, 틀림없이.
'내 이름을 어떻게...'
입사한 지 한 달 된 말단 연구원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 삼촌이 이 연구소 소장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순간 복도가 조용해졌다.
누군가 지나가다 걸음을 멈췄고, 저 멀리 탕비실 문이 슬며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텅.
"진명 소장님... 말씀이십니까."
"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네가 나를 상대로 규정을 따진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진명.
연구소 소장.
평소엔 사무실에 거의 없는 사람.
황야와 이역을 넘나들며 영수 토벌과 조사를 다닌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그 이름 하나가 갖는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다.
정처급 공무원, 강력한 영주.
연구소 안에서 진명의 이름을 잘못 언급하면 그 즉시 목이 날아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
입사 첫날 선배가 웃으며 해줬던 말이었다.
웃으라고 하는 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게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손끝이 저릿했다.
등줄기를 타고 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규정은 지켜야죠."
진월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제 재량이었습니다. 문제 있나요?"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왔다.
"...아닙니다."
대답이 나오는 순간 스스로도 놀랐다.
방금까지 규정을 외치던 내가 순식간에 꺾인 것이다.
혀가 마음보다 먼저 움직였다.
권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이 났다.
말 몇 마디로 사람의 척추를 접어버릴 수 있는 것.
"임 과학원, 조장님 앞에서 그런 말씀은 좀..."
이강호가 옆에서 눈치를 봤다.
그의 웃음이 유난히 비굴하게 보였다.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은 초조하게 진월희를 살피고 있었다.
"부조장님이 좋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진월희가 이강호를 보며 처음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이 낯설었다.
지금까지 본 어떤 표정보다도 인간적이었다.
이강호는 그 표정 하나에 얼굴이 밝아졌다.
"제가 앞으로 임 과학원 잘 관리하겠습니다."
관리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꿀꺽, 삼켜지지 않는 가시 같았다.
진월희가 다시 나를 봤다.
잠깐, 표정에서 이상한 게 스쳤다.
무시나 냉소가 아니라, 뭔가 다른 종류의 시선.
아주 짧았다. 0.5초, 아니 그보다 짧았을지도.
'뭐지.'
동정인가, 흥미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금세 사라졌다.
얼음은 다시 얼음으로 돌아왔다.
"업무 계속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조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가 정말로 끝났다는 선언 같았다.
이강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거봐요, 규정 따위 여기서는 안 통해요."
그의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깨 위에 얹힌 손바닥의 온도가 불쾌할 정도로 뜨거웠다.
"규정은 규정 아닙니까."
나는 그래도 한마디 던졌다.
"업무규정 제17조에 따르면 회의 참석 여부는..."
"아, 아, 됐어요, 됐어."
이강호가 손을 휘휘 저었다.
"법조문 읾는다고 여기가 법정 되는 거 아니에요. 여긴 연구소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캐비닛 옆, 좁은 책상.
컴퓨터 모니터엔 아직 정리 안 된 데이터 창이 열려 있었다.
서류 상자를 정리하다 문득 생각했다.
'이 연구소에서 계속 버틸 수 있을까.'
버티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옆자리 후배 연구원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과학원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하얘요."
"괜찮아요."
"조장님이 무섭긴 하죠. 근데 저희끼리 하는 말로는요..."
후배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 조장님, 소장님 조카라는 거 빼고도 진짜 실력이 있대요. 2품이면 정말 대단한 거거든요."
나는 대답 없이 서류를 정리했다.
실력이 있다는 것과 그 실력을 나에게 어떻게 쓸지는 다른 문제였다.
퇴근 시간이 됐다.
연구소 정문을 나서는데, 등 뒤로 여전히 진월희의 그 짧은 시선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잔상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날 밤, 나는 퇴근길에 평소와 다른 길로 들어섰다.
평소라면 곧장 집으로 갔을 텐데, 오늘은 발이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걷는 버릇이 있었다.
골목 안쪽, 낡은 간판이 걸린 거리.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끊겨 있고, 오래된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간판 글씨는 반쯤 벗겨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남주시 유물시장이었다.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다.
사연 있는 물건들이 헐값에 돌고, 때로는 위험한 것들도 섞여 나온다는.
바람이 불었다.
낡은 천막이 펄럭이는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