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심장이 가라앉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등판이 차가웠다. 방 안 공기는 눅눅했고, 어디선가 쥐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그 소리에 나는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이 지경이면 정말 문제다.
그냥 꿈이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익사하는 남자, 강가의 여인. 다 별 뜻 없는 조각들일 뿐이다. 요즘 하도 굶어서 머리가 이상한 그림들을 만들어내는 거다. 그렇게 정리하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자꾸 걸렸다. 여인의 얼굴이었다. 표정이 없었다. 슬픔도, 놀람도, 아무것도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서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나.
무심코 옆에 놓인 봇짐을 열어 그 낡은 책을 다시 꺼냈다. 그저 손이 가서 그런 거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사실 이유가 없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 꿈을 꾼 다음 날 밤에, 굳이 그 책을 다시 찾는 것 자체가 벌써 이유였다.
펼쳐 든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텅 비어 있던 페이지 하나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필체는 삐뚤빼뚤했다. 마치 급하게 써넣은 것처럼, 획이 여기저기 끊기고 번져 있었다. 먹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종이에 스며든 자국이 아니라 종이 위에 얹혀 있는 느낌이었다.
"강가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이 있다. 그녀는 그를 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런 게 쓰여 있을 리 없었다. 어제도, 아까도 텅 비어 있던 종이였다. 낮에도 확인했다. 분명히 백지였다. 내가 뭔가 잘못 본 건가, 아니면 정말로 글자가 생겨난 건가.
책장을 넘겨 다른 장을 살폈다. 다른 장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문질러 보았다. 잉크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냄새를 맡아봤다. 먹 냄새도 없었다. 오직 그 한 장에만, 방금 꾼 꿈과 똑같은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됐다. 이건 그냥 우연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배고픔에 지친 머리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거다. 아니면 잠결에 내가 뭔가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다. 종이에 원래 흐린 얼룩이 있었는데 내가 글자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럴듯한 설명을 몇 개나 만들어 붙였다. 다 그럴듯했다. 문제는 하나도 믿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런데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새벽까지 그 책을 붙들고 앉아 있었다. 몇 번이나 다시 펼쳐 확인했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등불이 다 타들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지가 마지막으로 타올랐다가 픽 꺼졌을 때, 나는 어둠 속에서도 그 문장을 눈으로 더듬을 수 있었다. 이미 외워버린 뒤였다.
강가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 구하지 않았다. 그 여인의 표정이 없던 이유가 그거였나. 후회도, 죄책감도 없이 그냥 지켜본 거였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그냥 이상한 꿈 이야기가 아니었다.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무엇을, 왜 나에게 보여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이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는 걸까. 아니면 이미 만났던 걸까. 강가 근처를 지나온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짚이는 얼굴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며칠 사이 만난 사람이라고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들 나를 문전박대한 사람들뿐이었다.
무섭다. 그 말이 솔직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서워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이 책이 뭔지 알아낼 방법도 없었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무당을 찾아가서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럴 돈이 없었다. 애초에 돈이 있었으면 이 고생을 안 했을 거다.
어쩌면 이건 아버지가 남긴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이상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고, 어머니에게서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이라 붙잡을 수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 얘기를 할 때마다 말끝을 흐렸다. 마치 더 말하면 안 될 것처럼. 어린 나는 그게 그냥 어른들의 비밀스러운 화법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아버지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까. 다만 그가 가끔 밤중에 마당에 나가 하늘을 오래 쳐다보곤 했다는 것, 그리고 그럴 때면 어머니가 굳이 나를 방 안에 붙잡아두었다는 것만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이 책의 정체를 캐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 책이 어디서 왔는지, 그런 건 다 배부른 자들이 궁리할 문제였다. 나는 지금 당장 오늘 하루를 넘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책을 다시 봇짐 깊숙이 넣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창호지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올 때까지,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지 않았다. 잠들면 또 그 꿈을 꿀까 봐 겁이 났다.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동이 트자마자 나는 옷매를 정돈했다. 그나마 덜 낡은 저고리를 골라 입고, 신발도 흙을 털어냈다. 소매 끝이 해져 있었지만 손으로 몇 번 문질러 폈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최소한의 몸가짐이라도 갖춰야 한다는 걸, 그동안의 굴욕에서 배웠다. 옷차림 하나로 사람 취급을 받느냐 마느냐가 갈린다는 걸, 여러 번 겪어봤다.
머리도 대충 손끝으로 정리했다. 물 한 방울 없이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놓였다. 거울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사치는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
봇짐을 다시 챙기면서, 나는 그 책을 만지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그걸 다시 펼쳐보면 하루 종일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다른 일에 집중해야 했다. 그 책은 나중에, 살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 들여다볼 문제였다.
덕흥전당으로 가는 길, 나는 걸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그 다음 방법은 없다. 이게 마지막이다.
길은 어제보다 더 붐볐다. 장이 서는 날인지 좌판을 벌인 상인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생선 장수, 옷감 장수, 놋그릇을 늘어놓은 노인.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며 괜히 걸음을 서둘렀다. 누군가 내 봇짐을 눈여겨보는 것 같아서였다. 사실 훔쳐볼 것도 없는 봇짐이었지만, 그런 불안이 자꾸 들었다.
거리 끝에서 낡은 개 한 마리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빛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강가의 여인이 나를 보던 눈빛과 비슷했다. 아무 감정이 없는 눈.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눈.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전당포 앞에 다다르자 문 위에 걸린 낡은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德興錢莊.
글씨는 금색으로 새겨져 있었지만 세월에 바스러져 이제는 회색빛에 가까웠다. 편액 아래로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한쪽 모서리는 벌레가 갉아먹은 듯 이빠진 흔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런 간판을 걸 정도면 나름 오래 버틴 가게라는 뜻이었다. 오래 버틴 가게는 대개 그만큼 셈에 능하다는 뜻이기도 했고.
나는 문 앞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여기서도 안 되면, 정말 다음이 없다. 그 생각을 하니 발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곰팡이와 먹 냄새가 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다. 낡은 나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겹겹이 쌓인, 시간이 그대로 눅어 붙은 것 같은 냄새였다. 벽에는 저당 잡힌 물건들이 늘어서 있었다. 놋그릇, 낡은 갓, 이가 빠진 도자기. 다들 누군가의 사연을 하나씩 짊어지고 여기 걸려 있는 것들이었다.
계산대 뒤에 앉은 청년 하나가 나를 흘겨보았다.
그 눈빛에서 벌써 답이 읽혔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는 눈빛.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앞으로 다가섰다. 여기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