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황서아가 정자에 웅크리고 앉아 밤새 떨었다는 소식은 산문을 오르내리는 시동들의 입을 타고 서도현에게 전해졌고, 서도현은 그 이야기를 스승에게 알리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으니, 약선문 문주 허현담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닿기까지는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허현담은 늘 그렇듯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어 처음 보는 이는 그를 인자한 노인으로만 여기기 일쑤였으나, 오래 그 곁에 머문 제자들은 그 미소 뒤에 감춰진 것이 결코 순수한 동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거래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면 웃는 얼굴로도 상대의 목줄을 죌 수 있는 자였다.
허현담은 조용히 정약방을 찾았다. 그가 정노인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곁에서 지켜본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다음 날 정노인의 안색이 종이처럼 새하얗게 변한 것을 본 이는 여럿이었다. 정노인은 그날로 사람을 보내 황서아를 다시 불러들이려 했다는데, 그 급한 발걸음과 초조한 눈빛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고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문밖으로 내쳤던 자가 어찌 그리 급히 마음을 바꾸었는지, 그 속을 짐작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황서아는 이미 정약방의 문턱을 다시는 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뒤였다. 손등에 남은 동상의 흔적과, 문밖에서 밤새 떨던 그 살갗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으니, 아무리 정노인이 사람을 보내온다 한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얼어붙은 강물처럼 굳어 있었다. 허현담은 그런 그녀의 결심을 눈치채고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약선문 산문 아래 조용한 약초 정리소에 그녀가 머물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그곳은 각지에서 올라온 약재를 갈래별로 나누고 말리는 곳으로, 손끝이 야무진 이가 아니면 함부로 맡길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일이란 게 그렇소. 은혜를 입었으면 갚을 방도를 찾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겠소." 허현담이 나지막이 그 말을 건넬 때, 그의 눈빛은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약초 다발을 향해 있었으나, 그 말속에는 결코 가벼운 뜻만 담겨 있지 않았다. 약선문이라는 이름은 산속에 숨은 조용한 문파처럼 들렸지만, 실은 각지 저잣거리의 상단과 관아의 아전들에게까지 은밀히 뻗어 있는 뿌리를 가진 세력이었으며, 그 뿌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는 허현담 자신조차 온전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도현은 스승의 이러한 면모를 볼 때마다 익히 알던 얼굴 뒤에 또 다른 얼굴이 숨어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고, 그 기분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이 흘렀다. 황서아는 아침이면 정리소에 나가 약재를 갈래별로 나누고, 오후에는 서도현과 함께 뒷마당에서 활을 겨루며 하루를 채워갔다. 겨울바람이 잦아들고 산자락에 남은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던 무렵, 그녀의 손끝은 예전보다 훨씬 능숙하게 시위를 당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은 굶주림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궁술이 비로소 제 빛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날도 산문에는 뜻밖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패검회에서 보낸 사자라는 청년이었는데, 검은 무명 장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장검 한 자루를 찬 그가 산문 앞에서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릴 때, 그 눈빛만은 형식적인 예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사방을 훑고 있었다. 허현담에게 인사를 올리는 절차를 마친 그는 우연히 뒷마당을 지나다 서도현과 대련하듯 활을 쏘아보는 황서아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녀가 시위를 놓는 순간, 화살은 마치 제비가 물살을 스치듯 정확히 표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쐐액—!
퍽!
그 짧은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사라지는 사이, 사자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굳었다. 패검회는 대대로 검을 숭상하며 활은 하수들의 잔재주로 낮춰보는 문파였건만, 그 사자가 유독 그 화살 하나에 눈을 떼지 못한 데에는 짐작하기 어려운 속사정이 있었다.
"저 여인의 궁술, 어디서 배운 것이오?" 그가 허현담에게 낮게 물으며 던진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무게가 담겨 있었다. 허현담은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산골 처자가 심심풀이로 익힌 재주라 대답했으나, 사자의 눈길은 여전히 황서아의 옆모습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목이 시위를 놓을 때 흔들림 없이 고정되는 각도와, 화살을 메길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떠는 습관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는 듯했다.
저녁 무렵 사자가 산문을 떠나며 남긴 마지막 말이, 문득 허현담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버렸다.
"저런 궁술은 아무 데서나 나오는 게 아니지. 회주께서도 관심을 가지실 만하겠소."
그 한마디가 산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동안 허현담의 눈빛은 순간 깊게 가라앉았으나, 그는 이내 평소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가 사자를 배웅했다. 황서아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저물어가는 산길을 따라 정리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붉은 노을이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렸고, 아직 꽃봉오리를 맺지 못한 산철쭉 가지들이 마른 바람에 서걱거리며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