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곽초의 시신을 수습하고 사흘이 흘렀으나, 황서아는 그날 밤의 감각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밤마다 시위를 놓는 순간의 진동이 손끝에 되살아나 잠을 설쳤고, 눈을 감으면 화살이 살을 뚫고 들어가던 그 미묘한 저항감이 손바닥에 그대로 되살아나 이불을 움켜쥔 채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서도현은 아무 말 없이 화롯불을 다시 살려 방을 데워주었을 뿐인데,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스며드는 온기가 그녀의 굳은 어깨를 조금씩 풀어주었으니, 그 무뚝뚝한 배려가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녹였다.
"사람 목숨을 처음 끊으면 다 그렇소. 나도 그랬으니." 그가 짧게 던진 그 한마디에는 위로도 훈계도 아닌, 그저 같은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담담한 공감이 담겨 있었다. 황서아는 그 말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그날 이후로는 화살을 쥐는 손끝이 조금씩 떨림을 덜어갔으며, 서도현 역시 더는 그녀의 밤잠을 묻지 않고 묵묵히 화로만 살려두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가는 동안 발목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고, 산 아래 마을 청하진에는 어느덧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봄기운을 알리고 있었다. 오두막 뒤편 산길에도 눈이 걷히고 흙냄새가 올라와, 황서아는 더 이상 오두막에 신세를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내 혼자 사는 오두막에 처자의 몸으로 계속 얹혀 지내는 것이 이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거니와, 서도현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 또한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눈치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황서아는 서도현의 소개로 마을 어귀 정약방에서 약재를 손질하는 일을 얻었다. 정약방 주인 정노인은 처음에는 그녀의 손끝이 야무진 것을 반겨 곧잘 웃음을 지었으니, 약재를 써는 칼질이 정확하고 말린 약초를 갈무리하는 손놀림이 여느 아낙보다 빨라, "손이 이만하면 시집가서도 살림 잘하겠구려" 하며 농을 건네기도 했다. 황서아 또한 좁은 방 한 칸을 세내어 살아가며 처음으로 스스로 벌어 먹는 삶의 소박한 기쁨을 알아갔는데, 하루 일을 마치고 받은 몇 푼의 삯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아영이라는 가명 속에 숨은 자신도 그럭저럭 사람 사는 흉내는 낼 수 있구나 하는 옅은 안도가 스치고 지나갔다.
서도현은 종종 약초를 캐러 나왔다가 정약방에 들러 그녀의 안부를 묻곤 했는데, 겉으로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밥값이나 제대로 벌고 있소?"라며 퉁명스레 굴었지만, 정약방 문턱을 넘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녀가 있는 안쪽으로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감추지 못했다. 황서아가 "밥값은 벌고도 남으니 걱정 마시오" 하고 톡 쏘아붙이면, 서도현은 그저 헛기침 한 번으로 답을 대신하고 등을 돌렸으나, 그 등의 뒷모습이 어딘가 느긋해 보이는 것을 정노인이 곁에서 눈치채고는 실없이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곁을 오가는 사이 봄바람처럼 자연스레 마음의 거리를 좁혀갔으나, 황서아는 여전히 자신의 진짜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 채 아영이라는 가명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밤이 깊어 홀로 방에 앉아 있을 때면, 서도현이 던진 그 짧은 말들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으니,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는 처지가 마치 매화나무 아래 서 있으면서도 정작 그 꽃그늘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정노인의 조카가 마을에 들르며 약재값 장부를 살피다가 몇몇 항목의 차이를 발견했다. 원래 이 조카는 정노인의 유일한 혈육으로, 정약방을 훗날 물려받을 셈으로 틈만 나면 장부와 재고를 들쑤시고 다니던 자였는데, 새로 들어온 낯선 여인이 못마땅했던 참에 마침 장부에서 어긋난 숫자를 발견하자 그 책임을 고스란히 황서아에게 뒤집어씌웠다.
"손 놀리는 계집이 들어온 뒤로 장부가 이상해졌다는데, 이만하면 알 만하지 않소." 조카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리 말했으며, 정노인이 "아영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다" 하고 두어 번 두둔했으나, 조카가 "숙부님이 사람을 너무 쉽게 믿으시는 게 문제요" 하며 몰아붙이자 정노인의 낯빛이 점점 흐려졌다. 결국 정노인은 조카의 말에 흔들려 며칠 만에 그녀를 내쫓았으며, 황서아는 억울함을 호소할 방도도 없이 세간을 챙겨 방을 나서야 했다. 정노인이 미안한 얼굴로 삯을 조금 더 얹어 건네주었으나, 그 손길에서마저 이미 정이 떠난 기색이 역력하여 황서아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물러났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그녀는 짐 보따리를 안고 마을 어귀 낡은 정자에 앉아 매화꽃이 아직 반쯤 봉오리를 맺지 못한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처지가 그 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니 밤이슬이 벌써 옷깃에 스며들었고, 저 멀리 오두막 쪽에서 흘러나올 화롯불의 온기가 아득하게 떠올랐다. 아직 세상에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접혀버린 신세였으니, 그 서글픔이 목젖까지 차올라 그녀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밤이 더 깊어지자 정자 너머 산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가 싶어 무심히 넘기려 했으나, 그 발소리는 점점 또렷해지며 정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 황서아는 짐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